몽생미셸 가는 길 58화
[대문 사진] 기욤의 결혼식 장면 동판화
암살과 음모 속에서 기욤이 노르망디 공국의 중심축으로 떠오른 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가 기욤 자신에 대한 반역자들과 공모하여 일으킨 전쟁인 발레 뒨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노르망디에 이중의 평화를 가져왔다. 사생아(바타르)의 정통성 확립과 더 이상 자신의 군주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였다.
발레 뒨느 전투가 끝난 저녁 드디어 기욤은 승리했고 그의 운명은 단 하루 만에 바뀌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무 살이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나이였다. 그러나 23살이 되었어도 기욤은 결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레 뒨느 전투 이후로 공국에서의 그의 권위는 확고해졌지만, 그러나 그는 공국의 저 끝까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기를 원하였다. 1050년 유(Eu) 성채에서 행해진 결혼식은 그의 이러한 원대한 시도의 결과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전기작가였던 브누아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보두앵 백작은 기욤을 자신의 딸인 마틸드와 결혼할 사위로 맞이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백작은 자신의 딸을 샤토 유로 데리고 왔다. 거기서 기욤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마틸드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 엄청난 결혼식을 끝마치자 기욤은 루앙으로 되돌아갔다. 루앙에서 또다시 보름동안이나 성대한 피로연이 되풀이되었다. 신랑의 모친인 아흘레뜨 역시 자신의 남편 엘루앵 드 콩트빌을 대동하고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했다.” [1]
후세에 제작된 동판화를 보면 기욤과 마틸드 간의 결혼식은 샤토 유에 속한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십자고상이 걸려있는 제단 앞에 주교가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서 혼배성사를 거행하고 있고 많은 하객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플랑드르의 마틸드는 노르망디의 기욤이 자신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을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날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틸드의 어머니가 아델이기에 그녀는 프랑스의 경건왕 로베르의 손녀가 된다. 따라서 그녀는 당시 집권자인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질녀가 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위그 카페와 아델라이드의 손녀이며, 가계를 더 올라가면 기욤의 5대조에 해당하는 기욤 롱그 에페와 혈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틸드의 혈통에 따른 왕가와의 근친관계는 앙쥬뱅의 적들로부터 늘 위협에 처한 기욤으로서도 바라는 바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교황은 랭스의 참사원을 통해 노르망디 공작을 소환했다. 마틸드는 기욤과 친척 간이었고 교황은 어느 경우에도 이 근친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천명하고 나섰다.
기욤은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갔다. 실상 부친의 혈통을 따지자면 마틸드는 이미 다섯 세대나 지나서 근친 문제는 희박하다 못해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속죄하는 뜻으로 수도원 두 개를 지을 것을 명령했다.
벡엘루앵 수도원장이던 랑프랑 드 파비는 기욤의 주문에 따랐고 후일 세워지는 캉의 생테티엔느 수도원장으로 부임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캔터베리 주교가 된 랑프랑은 마틸드와 결혼한 기욤 공작의 죄를 다투는 로마 교황청 법정으로 소환되어 잘못을 비는 사태에 이르렀다. 교황은 마침내 파문이라는 가벼운 형태의 처벌을 내렸다.
이후로 마틸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면 1066년부터 기욤은 노르망디와 영국에 동시적으로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공작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결혼은 이처럼 독특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들 부부가 서로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악의로 시작된 음모들은 기욤이 1067년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부터였다.
기욤이 23살이던 1050년 샤토 유에서 치러진 마틸드와의 결혼식은 기욤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유(Eu)는 당시나 지금이나 노르망디의 변방에 속한 지역이다. 오늘날 피카르디 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욤이 결혼식을 올릴 당시에는 대서양 북쪽 경계지역에 위치한 대단한 도성이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기욤은 결혼식을 올리고자 결심한 것이다.
이는 노르망디 공국의 확립과 영토 확장이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업에 기반을 둔 결정이었다. 16년 뒤에 있을 영국 정복과도 궤를 같이하는 사안이었다. 또한 기욤은 자신의 배우자인 마틸드의 부친의 영지에서 치른 결혼식을 통하여 아내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인시켜 주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수도에 버금가는 명성이 자자한 루앙에서 보름간이나 성대한 결혼식 피로연을 거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축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루앙 시민들은 보름동안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과시는 기욤의 결혼식을 통해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그는 명실공히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었다. 부인을 거느린 공국의 군주가 된 것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안주인이 된 마틸드는 훗날 공국의 수도로 자리 잡은 캉에다 아베이 오 담므(Abbaye aux Dammes) 수녀원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묻혔다. 기욤 역시 캉에다 아베이 오 좀므(Abbaye aux Hommes) 수도원을 세우고는 그 또한 그곳에 묻혔다.
이들 사이에 난 자식들은 앞으로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조인 바이킹들이 파괴한 기독교 문명의 재건에 박차를 가할 참이었다.
프랑스 역사에서는 소외당했지만 노르망디 역사에 있어서 절정의 시기는 바로 이때 기욤의 시대였다. 허약한 공국을 물려받은, 정통성조차 희미했던 기욤이 노르망디를 통일하고 프랑스 왕국의 위협이 되면서 동시에 영국 정복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1066년은 온전히 기욤이 이룩한 성과였다. 그에게 늘 정복왕이란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이유 역시 노르망디 공국과 바다 건너 영국까지 지배했던 화려한 이력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붙여주었다. 정복왕이란 수식어 대신 사생아(바타르)란 별칭은 그의 이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욤은 자신의 출생내력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다.
당시의 모든 군주들과는 다른, 오히려 정반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내력 때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며 또한 부족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도전을 통해 자신을 지켜간 끝에 정점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인간승리의 차원에서 영국 역사가들마저도 그를 윌리엄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윌리엄은 기욤을 영어식으로 부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앵글로 색슨 계의 헤럴드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무찌르고 1066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영국의 심장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화려한 영국 국왕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척박한 영국 땅에 노르망디의 선진 문명을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받기에 이른 것이다.
[1] 『Guillaume Le conquérant(정복왕 기욤)』. Éd. OREP, Bayeux, France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