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57화
[대문 사진] 정복왕 기욤
나는 드디어 처음 출발할 때의 목표로 정한 도시로 향했다. 길은 아름답다 못해 나를 흥분시키면서 이런 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꼬 지방에 대한 선입견을 거두어갔다.
감사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길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 싶었다. 잎사귀 푸르른 날에 찾아왔다 하더라도 감동은 같았을 것이다. 차라리 나무들이 헐벗은 풍경이 더 절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법했다.
계절은 각기 다른 빛깔로 마음을 물들이고 있지만, 가을은 쓸쓸하면서도 형언키 어려운 감정을 충만함으로 더욱 복잡다단하게 만들어간다. 그럼에도 나는 상쾌함을 느꼈고 황홀함까지도 덤으로 떠안았다. 이제는 저 천 년 전의 역사인 기욤의 시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911년 롤로에 의해 세워진 노르만 왕국은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으로 이어지고, 리샤르 1세와 리샤르 2세로 이어지다, 리샤르 3세 때 이르러서는 리샤르 3세가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너그러운 로베르로 알려진 로베르 르 마니피크로 이어져 이른바 ‘정복왕’이라 불리는 기욤이 공국을 물려받게 된다.
노르만 왕국이 공식적으로 노르망디 공국이 된 것은 리샤르 2세 때의 일로 공국의 수도는 훼깡이었다. 루앙에서 훼깡으로 수도가 옮겨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선조들의 땅 스칸디나비아와 해상으로 연결된 곳이면서 동시에 대서양가의 노르망디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은 해안마을에 불과했던 훼깡은 이후에 항구가 정비되고 도심에 대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된다. 더불어 리샤르 2세로부터 기독교 문명의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수도원장 기욤 드 볼피아노는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던 수도원을 재편하고 새로이 수도원을 설립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도원 교회를 새로 짓는다.
노르망디 각지에 대건축물들이 들어선 것 역시 이 시기부터다. 이런 흐름 속에 몽생미셸에도 수도원 교회가 들어설 수 있었다.
선량한 리샤르 2세가 죽자 공작에 대한 지위다툼이 벌어졌다. 리샤르 3세는 리샤르 2세에게 왕세자 적부터 반항했던 관계로 가신들이 주군으로 받들기를 꺼려했다.
이때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나섰는데, 두 사람은 형제관계였지만 생각이나 성품이 너무도 달랐던 탓에 리샤르 3세의 돌연한 사망(독살되었다고 알려졌다)으로 말미암아 노르망디 공국은 로베르 르 마니피크에게 돌아갔다. 명실공히 왕국을 물려받은 로베르는 주로 시골에서 머물렀다.
활래즈는 로베르에게 은둔처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활래즈에 머물면서 알랑송을 포위하고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던 벡쌍 지역의 소유권을 쟁취하였다.
또한 덴마크 왕 크누트에 의해 독점되어 온 부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했다. 기욤이 태어나기 30년 전에 이미 로베르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선단을 훼깡에 집결시켰는데, 폭풍우로 인해 로베르의 선단은 저지 섬 쪽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영국 대신 프랑스의 브르타뉴를 약탈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부친인 리샤르 2세의 통치를 이어받은 로베르는 교회들로부터 약탈한 재물들과 영지들을 되돌려주고 세리지와 몽티빌리에에 수도원을 건설했다. 1032년 11월 뷔르 숲 한가운데 건립된 세리지 수도원은 몽생미셸 수도원 이외에는 수도원이 없던 망슈 지역에 새로이 수도원이 들어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로베르는 이 두 곳 수도원에 수사들 대신 수녀들이 기거하도록 하였는데, 이 역시 노르망디 지역에 최초로 수녀원이 태어난 경우에 해당했다. [1]
1035년 1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베르 르 마니피크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떠난다.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고해성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훼깡에 남작들을 모이게 한 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기욤을 자신의 후계자로 책봉한다는 서약을 했다.
국왕은 군신들의 됨됨이를 미리 꿰뚫어 본 것처럼 아이의 장례를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로베르는 아이의 어머니였던 아흘레뜨까지도 보살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 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로 나섰다.
그러나 용맹스러웠던 그였지만, 소아시아를 떠돌다 지중해 연안의 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고행의 순례로 인하여 에너지가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어느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로써 기욤의 시대가 도래했다. 기욤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전설과 사실이 뒤섞여있어서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만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활래즈 도성에 정주할 때 알게 된 아흘레뜨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기욤이란 점만큼은 확실하다.
어머니인 아흘레뜨는 훗날 엘루앵 드 콩트빌과 결혼하여 오동과 로베르를 낳았으니 로베르 르 마니피크와 아흘레뜨 사이에서 난 기욤이 역사가들에 의해 ‘서자’ 또는 ‘사생아(바타르)’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 기욤과 딸 아에리를 낳았다.
기욤은 1027년이 다해가던 때 활래즈의 성안에서 태어났다. 아흘레뜨의 친정아버지 집에서였다. 활래즈 성채는 어린 기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그렇지만 1042년이 되면 기욤이 태어난 활래즈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아버지 로베르 르 마니피크가 사망하자 프랑스 왕이 달려들었다. 프랑스 왕 앙리 1세는 공작의 사망을 계기로 노르망디 공국에 끼어들었다. 프랑스 왕은 빈번해진 소요와 폭동을 부추겼다. 어린 기욤은 안중에도 없었다.
1042년이 되자 이에무아의 자작이자 활래즈의 경호대장이던 투스탱 고즈가 어리디 어린 공작의 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도시를 폐쇄했다. 아직은 힘이 없는 나이 어린 공작은 후견인이었던 라울 드 가세가 요새를 재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고 정규군을 양성하자 15살이 되었을 때 라울을 따라 처음으로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어린 공작의 지위는 낮에만 가능했다. 밤이 되면 암살자들이 두려워 성채를 떠나야 했기에 밤만 되면 경호대장인 투스탱이 공작행세를 했다. 이 시기에 어린 기욤은 발로뉴 지역의 기마여행 뒤로 또한 1057년 바라빌 전투 전까지는 활래즈를 피난처로 삼았다.
어린 공작의 측근들에 대한 살육이 시작되고 공국에 대한 확실한 권한마저 사라지자 공작령에 속한 영주들은 이전투구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 힘든 시기에 기욤은 모친인 아흘레뜨와 이복형제인 오동과 로베르와 함께 지냈다.
대서양 연안 옹플뢰르와 콩트빌 사이 세느 강이 바다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기욤은 세월을 거슬러 그의 선조들이 타고 다녔던 북쪽 스칸디나비아 배들과 닮은 범선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서쪽 저 멀리로는 하구가 자리 잡고 있고, 또한 그 너머에는 어마어마한 넓은 땅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 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세느 강의 조수가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조수간만의 차나 물살의 흐름까지도 읽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1047년 암살자들에 쫓겨 도망치던 베 만(灣)에서 그가 살아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발레 뒨느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으며, 1057년에 프랑스 국왕과 치른 바라빌 전투에서 공국의 승리를 가져다준 요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이때의 기억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기도 했지만, 공국의 확립과 나아가 영국 정복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음은 자명하다.
자신에게 반란을 획책하던 인물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기욤은 모친과 모친이 낳은 이복형제들인 오동과 로베르에 대한 애정에 영향을 받아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즉, 가계나 혈통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였는데, 다름 아닌 형제인 오동과 로베르를 중용하여 공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앞장섰다.
오동과 로베르는 기욤의 승승장구를 도운 인물들로서 죽는 날까지 기욤과 형제애를 나누었다. 바이외의 타피스리는 이들 3형제의 우애가 이처럼 돈독했음을 증거 해주고 있다.
로베르를 신임한 기욤은 그를 모흐탱의 백작으로 앉히고 공국의 주변정리를 맡겼다. 노르망디 공국의 사려 깊은 행정관이자 용감한 장군이기도 했던 로베르는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했다.
영국 정복을 눈앞에 두고 열린 릴본에서 개최된 참사회의에서 로베르는 정박에 필요한 120척의 선박을 제공하기로 결정했으며,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여 반대파들을 색출하고 저항했던 지역을 정벌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영토와 성들이 주어졌다. 실로 이제 노르망디 공국은 기욤을 비롯하여 오동과 로베르가 왕국의 중심인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1] 『Guillaume Le conquérant (정복왕 기욤)』. p. 18, Éd. OREP, Bayeux, France 참조.
[2] 사진은 위의 책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