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미에쥬

몽생미셸 가는 길 8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쥬미에쥬 마을의 옛 건물


쥬미에쥬로 떠나려 하는데 안개가 자욱하다. 겨울철이면 노르망디 지방엔 안개가 자주 출몰한다. 안개는 사물과 풍경을 가둬놓기에 충분하지만, 오후가 되면 힘을 잃고 따사로운 햇살에 자취를 감춘다.


한 밤에 내리기 시작한 안개비는 정오를 넘지 못한다. 지난 30년간 오간 길에서 깨달은 자연의 법칙이다. 정오가 지난 시각에 길을 잡은 탓에 점심식사는 길 위에서 들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점심을 위한 최적의 장소는 베르농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 노르망디 고속도로를 오가면서 들른 베르농 휴게소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점심메뉴를 선사했다.


호티 드 포흐(Roti de Porc), 구운 돼지고기 요리. 감자튀김이나 찐 밥 혹은 아리꼬 베흐(haricot vert)를 곁들인 식사는 점심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아리꼬 베흐는 강낭콩이 영글기 전 콩깍지를 살짝 데친 요리다.


시원한 맥주나 포도주 한 잔을 더하면 음식의 풍미를 더하겠지만 운전 중에는 과욕.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완벽히 제거한 탓에 음식은 입안에서 향긋하게 맴돈다.


전식을 먹지 않았으니 후식은 달콤한 사과파이(tarte de pomme)로, 사과파이는 노르망디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식 요리다.


노르망디 지방은 포도재배 임계점을 넘은 북위 45°에서 50°에 걸쳐있는 지역이어서 안개가 자주 끼며, 비가 자주 내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기도 하여 포도재배보다는 알이 굵은 과수재배가 성한 곳이다.


전형적인 해양성기후 탓으로 포도나무보다는 사과나무나 배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설상가상으로 일조량마저 적은 탓에 그나마도 과일로 직접 먹기보다는 술로 담그는 것이 태반이다.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 시드르(cidre)란 사과주이며, 증류한 것이 칼바도스(calvados)라 부르는 사과 증류주다. 배는 수분이 사과보다 많은 탓으로 증류주만 눈에 띌 뿐 발효시킨 와인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과 증류주인 칼바도스는 포도 증류주인 꼬냑과 같이 40도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지만, 사과 발효주인 시드르는 포도주와는 달리 알코올 도수가 2도를 넘지 않는다.


사과주는 어느 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차갑게 한 분홍빛 사과주(cidre rosé)는 해물요리에 제격이고, 달콤한 뒷맛이 해물요리에 끼얹은 크림소스의 느끼함을 상큼하게 가셔준다.


사과파이는 사과를 썰어 한쪽 한쪽 이어 붙여 밀가루 반죽 위에 얹어 구운 달콤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시작된 전형적인 후식, 사과파이의 달짝지근함은 식사의 포만감을 삭혀주면서 소화를 돕는다. 파이의 달콤함마저도 부담스럽다면 향으로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족하다.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안개가 걷혔다. 햇살은 완벽하게 사물을 원래 모습으로 환원해 준다.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도 없이 차의 시동을 다시 건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하다. 오후 4시 반이면 어둑어둑해진다.


시간을 지체할 겨를이 없다. 달콤한 점심식사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도착해서는 빅토르 위고가 상탄한 폐허를 돌아보면서 유적이 내게 뭐라 말을 걸어오는지 깨달아야 할 판이다.


쥬미에쥬 마을은 북위 49도 인구가 1,700명이 조금 넘는 노르망디 센 마리팀의 아주 작은 마을에 속한다. 세느 강이 휘돌아 굽이치는 비옥한 땅에 수목이 우거진 그야말로 옥토 가운데에서도 기름진 땅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역사유적이자 문화유산인 수도원 교회는 천 년 전에 이 땅에 세워진 노르망디 왕국을 대표하는 종교적 성지이자 프랑스 역사의 긴 흐름과 운명을 함께 한 보기 드문 영고성쇠의 현장이다.


한 때 번영을 누렸지만 파괴되고 그것도 모자라 새로 짓는 건물에 쓰일 돌을 채취하던 채석장으로 바뀐 운명을 증언해 주듯, 쥬미에쥬 폐허유적은 저 아득한 세월 뒤편의 형언하기 어려운 참상을 전해준다. 쥬미에쥬는 그처럼 세상사의 영고성쇠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