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34화
[대문 사진] 몽생미셸
수사들의 직무가 영적으로 기독교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면, 중세 인들의 간구의 대상인 하느님 다음으로 기도의 효력이 닿는 존재는 하느님과 신자들 간의 매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성인들일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수사들에 의해 치러진 성인들에 대한 제식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이냐는 차원에서 제식 자체가 성인들의 유골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또한 성인들의 유골들에 대단한 의미부여를 했다는 점에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 성인에 대한 숭배는 초기 기독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독교는 고대 이교도들의 숭배 의식을 약간 변형시킨 형태로 차용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성인들이 순교당한 날을 추모하는 이른바 생일(dies natalis)[1] 의식이 펼쳐졌죠. 여기서 생일이라 함은 순교자 성인이 천국에 이르러 다시 태어난 날을 가리키며, 고대 로마인들이 고인의 위령제를 지냄에 있어서 고인이 태어난 생일날을 제삿날로 정한 관습에서 비롯합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인의 위령제를 뜻하는 라틴어 페렌탈리아(perentalia)는 고인의 무덤에서 이루어지는 가족모임을 가리킵니다. 이 가족모임에서 산 자들은 고인의 무덤 앞에 헌화를 하고 장례음식을 차려놓고 제주(祭酒)를 따르면서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곤 했죠. 고인에 대한 이 같은 제사(위령제)는 순교자 성인들의 무덤 위에서 거행되는 초기 기독교의 성찬식을 태동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요컨대 신자나 순교자 또는 기독교 신자임을 표명한 영웅들의 유골들을 마주하고 바치는 공경 제례는 새로운 차원에서 그 규모를 점점 더해갔습니다.
이러한 공경의식은 그들의 모범적인 삶을 추억 속에 소생시키려는 노력이었으며, 아울러 신앙인들의 모델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롭기까지 합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들 자신이 공경하는 하느님 다음으로 하느님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중개자인 성인들께 은혜를 베풀어줄 것을 간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의 유골들이야말로 전능함과 신성한 힘을 지닌 것이며, 산 자의 기억 한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입니다. 신앙인은 성인의 유골함에 다가갈 때마다 이와 같은 힘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들의 간구를 통하여 좀 더 수월하게 그와 같은 능력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몇몇 성인들의 무덤에서 일어난 기적들은 이러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인의 유골들에게서 이루어진 기적들이야말로 전능한 효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성인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는 교회나 수도원에 수많은 군중을 들끓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행운이 뒤따랐기에 교회들을 비롯하여 수도원들 모두가 모든 이들의 공경의 대상인 성인들의 유골들을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바탕에는 성인 유골 자체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유골 조각 하나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까지도 배태한 것입니다.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양상을 띠어갔습니다. 신앙심을 고취하는 성인의 삶에 관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자 여기저기서 순교자 성인과는 무관한 시신의 유골을 캐내어 실제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기적은 그렇듯 지어낸 이야기들을 인증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죠. 경우에 따라서는 유골들을 탈취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었습니다. 아장(Agen)에서 순교한 어린 성녀 화(Foy)의 성골함을 꽁끄 수사들이 탈취한 사건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경우에 속합니다. 꽁끄의 수사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수도원을 성소로 만들고자 이 같은 짓까지 벌였던 것입니다.
완곡하게 말한다 해도 ‘남몰래 슬쩍하는 짓’ 역시 도적질에 가깝습니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카스트르 수도원의 수사들이 사라고사의 빈센트 성인의 유골을 은밀하게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가져온 경우입니다. [3]
성인들의 유골함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수도원으로써는 명성을 드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따금씩 이를 훔치고 은밀히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도 자행되었습니다. 660년에서 707년 사이 흘뢰리 수사들은 성 베네딕투스가 창건한 몬테 카씨노 수도원 폐사지에서 성인의 유골함을 탈취했습니다. 수도원은 이미 롬바르디아 인들에 의해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이곳에서 발굴해 낸 ‘수사들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성인의 유골은 루아르 강을 따라 운반되어 흘뢰리 수도원에 안치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따금씩 마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종교의식에 반응을 나타내는 데에 모종의 거북함마저 느낍니다. 사람들이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 역시 마땅치 않았거니와 몇몇 종교제식이 기적을 구하는데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교회와 함께 권위를 지닌 성직자들은 이러한 공경제식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매번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공경제식은 이제 위험수위에 도달할 만큼 넘쳐났으며, 서로 경쟁하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신앙심을 유지하는 일과 동일선상에 놓여있던 관계로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성인들에 대한 제식은 11세기와 12세기 종교 예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순교자 성인이나 그의 유해가 안치된 무덤을 공경하고자 새로이 지은 교회들만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신자들이 성골함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죠.
더군다나 성인들에 관한 삶을 기록한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각들과 수사본삽화들, 회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에 있어서 풍부한 표현을 부추기는 원대한 동력으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금은 세공사와 금은에 유약을 바르는 장인들은 성물함 제작에 있어서 놀라우리 만큼 창조적인 발명품들을 쏟아냈습니다.
교회는 성골함 제식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면서 이를 적절히 조절하여 공식적인 공경 제식으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른바 성인으로 시성된 수많은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을 축일 달력을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이어서 공경 제식을 공식적인 전례로 끌어들여 서로 다른 날에 제식을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조정하였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몇몇 곳에서 성지순례가 추천되기에 이르렀으며 적극적으로 장려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지순례는 중세사회에서 신앙심에 의해 촉발된 가장 대중적인 운동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지순례가 태동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요인인 파탄에 이른 일상적 삶에 어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소를 향하여 자발적으로 순례를 떠나는 일들이 늘어남으로써 자연스레 태동한 것이지요.
성지순례를 통하여 기독교도들은 간혹 물질적인 안락함을 포기하면서까지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힘을 얻고자 갈망했습니다. 이들에게 닥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요컨대 노동과 삶의 틀을 지탱해 준 안전에 대한 불안증세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지순례는 하느님이 처음 선택한 이들에게 요구한 스스로를 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으라 했던 오래된 전통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모세 또는 광야에 살던 히브리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 모두는 각자 부름을 받고 정처 없이 광야를 헤매고 다닌 자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가 부자 청년을 부른 경우 역시 빼놓을 수없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오 21장 21-22절).
순례를 떠나기에 앞서 행해지는 종교적 의식은 상징적인 의례와도 같았습니다. 순례자의 지팡이와 바랑은 반드시 본당 신부가 축성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편력이나 기행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낯선 땅에 잠시 머물다’ 떠나야만 하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 어 파로이켄(paroikein)이란 말이 가리키는 뜻이 그러합니다. 본당(paroisse)이란 용어는 바로 이 그리스 어에서 파생했습니다. 파로이키아(paroikia)란 말은 따라서 지금 여기 운집해 있는 신자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를 일컫습니다.
초창기 성지순례는 예루살렘을 향한 것이었죠.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이 지상에서 마지막에 다다를 천국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떠오른 장소는 예수가 거쳐 간 곳을 떠올려줍니다. 베들레헴, 올리브 동산, 나사렛 마을 인근에 위치한 타보르 산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살아생전의 예수를 증언했던 이들의 무덤을 찾아 떠나는 순례가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 묻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성지순례의 목적지는 성인들의 무덤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순례지에서 엄청난 기적을 바라던 이들은 성인들의 유해가 안장된 성소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순례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이 가장 애호하는 순례지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였습니다. 한편으로 아주 먼 옛적에는 순례자들이 자주 모여든 곳이었지만, 노르망디 인들의 약탈로 쑥대밭이 된 투르의 생 마흐탱은 아주 위험한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몇몇 지역은 엄청난 명성을 얻어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사도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 콤포스텔라였습니다. 11세기 초에 일어난 기적에 힘입어 콤포스텔라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도상에 자리한 마을 르 퓌 앙 블래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수많은 군중을 또한 그곳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성지는 성 미카엘이 발현했다는 몬테 갸르갸노입니다. 이와 더불어 성 미카엘 천사장과 관련한 몽생미셸 또한 순례지로 각광받습니다. 몽생미셸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경계에 해당합니다.
성지순례의 대표적인 성소로 자리한 성지들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던 순례자들은 중간에 새로운 성지들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성지들은 명성이 자자한 대표적인 성지와 동반상승하면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지를 향한 길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길입니다.
콤포스텔라를 향한 도상에 이어진 길들 역시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성소입니다. 르모비첸시스 길(via Lemovicensis)이라 불리던 길은 마흐시알 성인에 대한 공경으로 기도를 바치던 길로 리모쥬까지 이어집니다. 똘로사나 길(via Tolosana)은 기욤 성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젤론느에 이르러 사튀르맹 성인의 무덤이 있는 툴루즈를 향하고 있습니다. 퓌의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던 포디엔시스 길(via Podiensis)도 있습니다.
순례길에는 로마네스크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습니다. 건축물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진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술적인 독창성과 새로운 기술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들이 순환하고 있는 것이죠. 건축물들 서로 간에 예술적으로 연결된 건축물들 또한 서로에 의해 진화해 갔던 것이 분명합니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교회들은 그처럼 순례자들을 특별히 환영해 줍니다. 날이 저물어 미사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도 순례자들의 특별한 요구에 부응해주기까지 합니다.
생 기엠 르 데제흐 수도원은 9세기에 아끼탠느의 공작 기욤이 창건했습니다. 기욤(Guillaume)이란 이름은 수도원이 위치한 프랑스 랑그도크(Langue d’Oc) 지방에서는 기엠(Guilhem)이라 부릅니다. 기욤 공작은 샤를마뉴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무훈시 「기욤의 노래(Chanson de Guillaume)」로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창건자의 후원에 힘입어 젤론느 수도원이 들어섰고, 그는 812년에 이곳에서 사망합니다. 이후에 이곳은 순례자들이 자주 찾는 성지순례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1] 여기서 생일에 해당하는 라틴어 dies는 ‘날’에 해당하며, natalis는 ‘태어난’ 이란 뜻입니다.
[2] 꽁끄(Conques) 마을은 인구가 겨우 250여 명에 불과한 프랑스 아베롱 지방의 한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에 자리 잡은 수도원 교회에는 서기 3세기에 13살의 나이로 순교를 당한 성녀 화(Sainte Foy; 스페인 어로는 산타페(Santa Fe)라 불립니다)의 성골함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꽁끄 마을은 11세기에 바질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생트 화 수도원 교회로 유명한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기독교 성지 가운데 한 곳입니다. 수사본 삽화가 전하는 성녀가 순교당하는 장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3] 사라고사의 빈센트 성인(3세기)의 유골함은 542년에 파리로 옮겨와 생 뱅상(빈센트)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가 생 제르맹 데 프레로 이름이 바뀐 현재의 성당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빈센트 성인은 포도주의 성인이며, 축일은 포도나무가 순을 내미는 4월 5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