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33화
[대문 사진] 홍뜨브로 수도원 안뜰 회랑
로마네스크 예술이 태동하고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수도회들이 자리한 중심지에서였습니다. 실상 11세기와 12세기에 유럽의 많은 수도원들은 영성적이고도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삶 한가운데에 그들의 역할의 본질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부터 수사는 속인과 성직자 중간에 위치하던 존재였습니다. 실상 가장 완벽한 삶에 대한 어떤 부름을 받고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선회를 한, 홀로 고독하게 혹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수사 역시 한 사람의 속인이었던 셈입니다.
10세기까지 대다수의 수사들은 정확히 말해서 성직자 계층에 속한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정한 성스러운 계율에 따를 필요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사제 서품이 자연스레 자리 잡아갔습니다. 이는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치려는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수도 성직자라 일컫는 수사 겸 사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수도승에 대한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수도원 교회 건축물을 짓는 데 있어서 충격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환란의 세상에 등을 돌린 수사는 가장 완전한 삶에 대한 열망을 품고 또 다른 세상을 추인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세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에 있어서 모두의 역할이 보다 명확히 나누어진 채 잘 조정되고 있기 때문이란 사실 역시 깨닫습니다.
수도승은 오로지 기도만 수행하는 쪽이거나 아니면 노동을 하는 쪽이거나 서로 투쟁을 일삼거나 어느 한 편에 속해있어야만 했습니다. 수도승의 기도와 고행이 얼마나 값진 것이냐 하는 문제나 그 효능에 관한 문제 역시 얼마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느냐 하는 문제에 전적으로 달려있었습니다. 수사는 그럼으로써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의 정령을 축출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의미에서 그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도성을 방어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사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노동을 통해 먹을 것을 마련하는 일에 매진하기도 합니다.
수사의 바람직한 이상이란 것도 알고 보면 구원을 확신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한, 철저히 비관론적인 입장에서 또한 부정적 인식으로 가득 찬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3세기 때 이집트 광야에서 출현한 수도생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최초로 수사에게 제안된 규칙은 4세기에 마케도니아 성인 바실레이오스가 마련한 것입니다. 대단히 균형 잡힌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긴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사물들을 대하는 관점은 전혀 다르지가 않습니다. 바실레이오스는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교부들처럼 신플라톤주의[1]의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고 공허하니 물질적 행복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것을 천명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이러한 생각은 이원론자들의 고루한 관념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물질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정신을 주장했던 이원론자들의 관념은 11세기에 영성과 구도에 닻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빛을 보게 된 종교개혁 운동들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렇지만 몇몇 종교개혁 움직임들은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기도 합니다.
카타리 파에 속한 ‘기독교 이원론’이 그 주요한 과녁이 되었습니다. 카타리 파는 12세기에 특이하게도 오크 어를 사용하는 지역(프랑스 남동쪽 지역에 속한 옥시타니)에서 교세를 넓혀갔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였죠. 실제 상황에서도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진 복음주의적 삶이 이상적 삶으로 인정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실질적인 효력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가톨릭 수사들과 성직자들이 가세하여 카타리 파[2]에 속한 ‘선한 기독교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저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선한 기독교인들은 카타리 파의 복음주의적 삶에 더 매력을 느꼈죠. 신자들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삶의 본보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더군다나 가톨릭 수사들과 성직자들은 오크어가 아닌 라틴어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수사들과 성직자들은 온갖 매수가 판을 치는 저 밑바닥 세상은 사탄이나 마왕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설교했습니다. 교회는 또한 물질세계 역시 신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설파하기도 했죠. 그러나 전교는 그렇게 평화로운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설교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한 핵심은 “우리가 인지하는 이 세상의 창조물들은 모두 선한 것이다. 그러나 온갖 속임수와 사악한 짓을 통해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가 바로 악마다. 악마야말로 원초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을 원죄를 통해 타락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물질세계는 선하다는 심오한 확신 없이는 로마네스크 예술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재료 역시 신이 빚은 것이며, 인간의 창조적 능력 또한 신의 작품이라는 확신 없이는 로마네스크 예술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10세기말에 이르면 서양의 모든 수사들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 누르시아 태생의 베네딕투스 성인이 몬테 카씨노의 수사들에게 부과한 규칙의 제 방침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6세기에 만들어진 이 규칙은 8세기말에 브누아 아니안느 수사에 의해 빛을 발하고 다시 적용됩니다. 브누아(베네딕토) 아니안느는 817년에 경건왕 루이를 통하여 카롤링거 왕국에 속한 모든 수도원들에게 이 규칙을 적용할 것을 부과하고 나섰죠.
9세기 때 베네딕트 수도회 수사는 개인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을 단념하고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수도원 안에서 기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이라 해서 돈의 가치나 효용성까지도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공동체는 평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기부금으로 인해 점점 부유해져 갔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혼이 구원되길 바라는’ 봉헌금이나 수도자의 삶을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내는 일종의 ‘보시적 성격을 띤 기부금’때문이었습니다.
수사를 지원한 이들은 자신의 몫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수사가 된 이들은 이들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이들도 있었는데, 수도원은 이들 역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수사들은 귀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죠. 이러한 사실은 수도원들이 대단히 부유했다는 점에서 확인됩니다. 수도원들은 로마네스크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909년 혹은 910년에 클뤼니 앙 마꼬내에 창건한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원을 재정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독립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세운 것입니다. 이곳에 기욤 다끼탠느는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수도원은 산 자나 죽은 자 할 것 없이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설립된 ‘기도를 바치는 안식처’로 인식되었습니다. 교황 역시 수도원에게 자체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이를 적극 보호하고 나서기까지 했죠.
게다가 기부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수도원 공동체가 마음대로 수도원장을 선출할 것을 미리 예고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수도원의 모든 재물에 대한 약탈, 강탈, 횡령, 사취를 피하고자 재물은 일반 평신도나 성직자나 할 것 없이 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놔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두 번째 원장으로 등극한 성 오동(927-942)은 교황의 지지를 받자 용기를 내어 다른 수도원들에서는 불이 꺼진 개혁의 원칙들을 자신의 수도원에 과감히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수도원의 성공은 교회 개혁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왕국의 모델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적어도 11세기말까지는 왕국의 수도원 가운데에서 클뤼니 수도원이 으뜸이었습니다.
클뤼니 수도회는 네 지역에 흩어져 나뉜 기독교도들에 맞춰 수도원 역시 4 등분하여 구역을 분할하였죠. 4 등분된 구역은 수도회에 예속된 수도원들과 원래부터 독립된 수도원이었지만 이후로 클뤼니 수도회에 순종한 수도원들로 채웠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장은 수도회에 속한 모든 수도원들을 관할하는 일종의 군주와도 같았죠.
실제 그는 각 지역의 수도원장(프리외흐 또는 아베)[3]에 대한 서임을 시행했습니다. 각 지역의 수도원장들은 늘 마주하는 교구 소속 주교로부터 그들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고뉴에 위치한 가장 큰 수도원에 매달 정기적으로 돈까지 상납했습니다.
교황청으로부터 클뤼니 소속 수도원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주교에게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죠. 마찬가지로 권력을 지닌 평신도들과도 늘 친분을 이어갔는데 이들로부터도 세금, 노역 따위를 면제받는 특권도 누렸습니다.
강력한 클뤼니 수도원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즈음 온 유럽에 그에 대한 평판이 자자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클뤼니 수도원장의 권위는 거의 교황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습니다. 1076-1077년에 발생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 세간에 벌어졌던 황제 서임권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논쟁에서 클뤼니 수도원장이 왕자들 곁에서 이를 스스로 조정했다는 것은 그 권한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도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클뤼니 수도원 건물을 본떠 지은 교회 건축물들 역시 수두룩하다는 점도 클뤼니 수도원의 명성이 어떠했는지를 가늠케 해 줍니다.
하지만 클뤼니 수도회와 그에 딸린 수도원들의 점점 증가일로에 있던 재산과 재물의 축적은 수사들의 생활방식을 수면 위로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베네딕투스 성인이 구상했던 이상적인 수도원의 모습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이었던 탓입니다.
수사들의 삶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락했으며, 수도원의 규칙 또한 거의 마비상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수도원 교회들 역시 지나치게 장식들로 꾸며졌으며, 제식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기만 했습니다. 수도생활은 확실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보다 완전한 삶이 무엇 일지에 대해 고민하던 몇몇 수사들은 은수자의 삶으로 돌아섰습니다. 혹자는 구태의 수도생활을 개혁하기에 바빴죠.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에 따라 보다 더 신실하게 수도생활에 임하고자 했던 열망에 부응하여 마침내 1098년에 시토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시토회의 위세도 클뤼니 수도회가 그러했듯이 금방 이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개혁을 통해 새롭게 혁신된 수도원들이 등장합니다. 1101년에 호베르 다흐브리쎌이 창건한 홍뜨브로 수도원이 이에 해당하며, 1084년에 브뤼노가 창건한 샤르트뢰즈 수도회가 그러하고, 1043년에 호베르 드 튀흘랑드가 설립한 하느님의 권좌 수도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성직자 연합체 또한 개혁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죠. 그의 후계자인 우르반 2세(1088-1099) 역시 마찬가지로 개혁 운동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시골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시골은 시골대로 늘 물질적으로나 영성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1059년에 발의한 로마 공의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창한 규칙을 대성당 참사회와 성직자 회의에서 채택할 것을 제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빈과 공동체 생활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은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가 5세기에 창건한 공동체에 적용했던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수많은 교회 참사회 공동체들이 그와 같은 규범을 채택하였습니다. 선두주자로 나선 곳이 프랑스 남부 대성당들의 참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규범을 따르는 참사회 공동체들 또한 늘어만 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곳은 서로 연합하여 수도회들로 거듭났죠. 생 뤼프 아비뇽 수도회, 생 빅토흐 드 파리, 그리고 1120년에 노흐베흐 드 장땅이 창건한 프레몽트레 수도회가 가세했습니다. 이 수도회들은 여러 수도원이 한데 연합하여 하나의 수도회로 거듭난 것입니다.
더불어 12세기에 불어 닥친 교회 참사회 운동의 중요성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2500개가 넘는 수도원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11세기말에 시작된 수도원 개혁은 자연히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때 완성한 교회 건축물들은 대개가 다 소박하며 크기도 작을뿐더러 건축물에 거의 장식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입니다.
[1] 신 플라톤주의는 기본적으로 이데아 계와 현상계라고 하는 플라톤적 양분론을 계승하고 있으나 신에 의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플라톤주의와 구분됩니다.
[2] 중세 이단으로 지목된 일파인 카타리 파의 교리는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교파로서 11세기에 프랑스의 랑그도크(Langue d'Oc)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12-13세기까지 교세를 확장하였습니다.
[3] 프리외흐(prieur)는 공동체의 수도원장이며, 아베(abbé)는 수도회 소속 수도원장에 해당합니다.
[4] 홍뜨브로(Fontevraud) 수도원은 1105년에 착공하여 1160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수도원에는 처음 수도원을 창건한 호베르 다흐브리쎌(1116 영면)이 잠들어 있습니다. 또한 헨리 2세에 의한 플랑타쥬네 왕국의 주역들도 함께 묻혀있습니다. 특히 사자왕 리샤르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중세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홍뜨브로에 매우 중요한 수도회와 수녀회를 2개씩이나 설립했던 수녀원장은 별관을 짓고 수사들과 수녀들을 영접하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