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32화
로마네스크 예술의 출현은 본질적으로 종교 예술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건축물에 대한 주요한 출자자인 교회 권위의 확립과 궤를 같이합니다.
10세기말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교회 제도는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성직자 사회 또한 구성원을 잘못 선출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며, 그들의 태도는 항상 뻣뻣했을 뿐 아니라 공격적인 태도까지 지닌 조직체를 연상케 했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몇 군데 수도원에서 그나마 예술과 고전문학을 지도하는 교육체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일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한다는 것 또한 명예롭지 못한 일로 간주되곤 했죠. 지적으로 상당히 부족한 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부들의 가르침 이상으로 이를 개선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제기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가운데 제르베르 도리약이 훗날 실베스테르 2세(999-1003)란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가 몸 담았던 시대에 교양을 갖추기 위한 그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한 불행한 경우에 속했습니다. 그는 단지 몇 권의 저서를 읽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죠. 그나마도 그가 접한 책자는 그 내용이나 양에 있어서 너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비춰볼 때 이슬람 세계와 인접한 국경지대에 위치한 리폴(Ripoll) 수도원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했습니다. 수도원 도서관에는 서양의 어느 도서관도 소장하지 못한 책들로 가득 쌓여있었죠. 그러나 로마 제국에 속해있던 수도원의 명성은 그 자체로 시들고 말았습니다.
교황청이 불능 상태에 빠졌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물밀듯 밀어닥치는 동방의 대주교들의 공격과 함께 진행된 파괴와 분열을 막아낼 만한 신학적 설계를 수립함에 있어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춘다는 것 자체가 역부족이었죠.
서양에서 실베스테르 2세 전에는 교황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를 강제할 만한 충만한 인격체가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합니다. 샤를마뉴가 교황의 권위를 지지한다고 천명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나마도 샤를마뉴는 로마 주교에게 단지 옛 라틴세계의 모든 지역에 대한 그의 임기를 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만 언급했을 따름입니다.
이런 조건적 상황에서 참으로 덧없는 권력을 찬탈한 영주들은 교회들을 제멋대로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키는 대로 아무나 주교로 앉혔으며, 종교적 삶, 즉 성업(聖業)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아무구나 수도원장으로 앉히는 불행한 사태마저 초래하였죠.
주교 직이나 수도원장 직이나 할 것 없이 이들이 강제한 윤리적 잣대 또한 제멋대로였습니다. 성직 매매를 통하여 주교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만 갔습니다. 귀족들은 차남을 주교 직의 맨 첫머리에 앉히려고 성직을 사들이기도 했죠.
더불어 찬탈한 재물로 인하여 소득도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세르다뉴 백작의 아들이었던 기프레드가 17살의 나이에 나르본의 대주교가 된 사건입니다. 대성당에 소속된 참사회로 들어오는 금화를 유의 깊게 주시한 백작이 벌인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10세기말에 들어서면 클뤼니 수도원의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교회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클뤼니 수도원은 속인에 불과했던 영주들과 더불어 주교들로부터 조차도 벗어나고자 했으며, 동시에 권위를 지닌 교황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중의 한 명이 훗날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란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힐데브란트입니다.
그는 체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오늘날 이른바 그레고리안 개혁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죠. 그는 세속인들이 주교에 서임되는 것에 불굴의 투지로 맞섰음은 물론 왕자들의 후견인이 되는 것조차 마다했습니다. 또한 파문이란 극약 처분을 내리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성직자의 품행이 정결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결한 품성 함양을 위한 격렬한 투쟁도 함께 전개해 나갔습니다. 11세기말에 이르러 교회는 비로소 교회의 자율권과 권위와 맞물려 물질적 풍요 또한 되찾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1세기야말로 상황의 진정한 변전이 이루어진 시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시민사회에 종속되어 있던 교계 체계가 바로 선 때도 이 시기입니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0세기말에 이미 몇몇 주교들은 민간의 일들에 개입하고 나섰죠. 주교들은 지나치게 빈번한 전쟁을 제한하고자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른바 하느님에 의한 휴전[2]이 그것이었는데, 이는 봉건 제후들끼리의 지칠 줄 모르는 싸움으로 말미암아 삶이 파탄 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레고리안 개혁의 핵심은 사회를 향한 교회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면 주교의 임명권은 교황의 전적인 권한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의 본거지에 자리한 교회는 지상에 ‘하느님의 도성’을 건설할 임무를 완수할 영성적이고도 물질적인 힘을 규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설득력은 마침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교회를 거부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교회가 나서서 황제를 파문함으로써 발생한 팽팽한 싸움에서 교회가 승리한 것은 교회의 권위가 한층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나아가 교회는 스페인의 해방과 더불어 기독교도 왕자들을 지지함을 천명했을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벌어질 무모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기 위하여 유럽을 움직이기에 이르렀습니다.
[1] 옛적부터 서쪽 정면 부분(파사드)을 뒤덮었던 그림들과 조각들은 리폴의 스크립토리움(필사실)에서 완성한 수사본의 삽화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명성이 높았던 리폴 수도원은 수많은 수사본들을 풍부하게 소장한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에서 훗날 새 천 년에 교황이 되는 제르베르 도리약이 수학합니다.
[2] ‘하느님에 의한 휴전’이란 11세기에 교회 명령으로 지켜지던 영주 간의 휴전을 가리킵니다.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모든 폭력 사태를 금지했습니다. 종교적 축일에도 이를 금지시켰죠.
[3]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라 부르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1077년 1월 25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하여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서 3일간을 무릎 끓고 용서를 구한 사건을 일컫습니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황제와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