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스크 성들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31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카탈루냐의 산 빈첸스 카르도냐 성채


987년에 카페 왕조가 출현한 시기와 맞물려 서양은 온갖 성들로 뒤덮여갔습니다. 성주들의 영지 위에 지어진 성들은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자 봉건 영주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거주지에 해당하며, 영토를 수호하는 최후의 요새이자 또한 위험에 처한 백성들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요새화된 성들은 10세기에 와서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정치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와해되자 이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면서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죠.


10세기는 노르망디인들, 사라센인들, 훈족의 급습에 따른 위험이 점차로 증가하던 시대였고, 더하여 국왕의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세력들을 막론한 영주들의 독단적인 정치가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영주들은 영토를 수호할 임무와 영지에 성(castrum)을 지을 권한이 부여된 국왕에 의해 제청된 제후들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특권을 이용하여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국왕의 권한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에 영주들에게 불하된 땅들이 자리했던 탓도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산언덕이라든가 산꼭대기 또는 섬들이 이에 해당했습니다.


께리뷔(Quéribus)의 성채에 세워진 동종, 후씨용(Roussillon).


10세기와 11세기에 지어진 요새들은 흙과 나무로 지어진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요새는 적은 숫자의 수비대만으로도 이룰 방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또한 소규모 적들의 포위공격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여지를 갖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관계에 놓인 영주들 간의 그칠 줄 모르는 모함과 싸움으로 몇십 년간을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서로의 성채를 공격하는 사태가 빚어집니다.


1077년에 제작한 바이외의 태피스트리가 증거 해주듯, 요새들 대부분 둔덕 위에 세워진 성채’였던 까닭은 공사비용이 적게 들고 단순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사를 진척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주에게 속한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관계로 빨리 공사를 끝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작용했던 이유에서였습니다. 공사 기간이 대략 20일 내지는 많이 걸려도 3개월 내에는 요새를 구축하고 성채를 짓는 일을 마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거죠.


봉건시대 초기에 지은 요새들은 원뿔 모양의 나무 밑동처럼 흙을 쌓아 만든 둔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나무로 제작하여 설치한 탑이 왕관 형상으로 둔덕 위에 높이 올라선 형태이죠.


성채 발치에는 가금 사육장이라 부르는 궁정 안뜰이 한 곳 또는 두 곳에 걸쳐 자리 잡았습니다. 성채 둘레로는 깊이 파인 구덩이(외호 또는 해자 형태의)가 에워쌌습니다. 외호 바깥 경사면 둘레는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치기도 했죠. 적의 침입을 받아 위험에 처할 때마다 주민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궁정 안뜰에 머물 수 있도록 조처하였습니다.


궁정 안뜰은 튼튼한 울타리가 처졌으며, 농사와 관련한 것들은 물론이고 궁정 안에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가사를 돌보는 여러 채의 다양한 건물들이 밀집했습니다. 이곳에 영주 자신의 거처도 마련했는데, 올라(aula)라 부르는 크고 호사스러운 거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카르카손(Carcassonne) 백작의 성 입구.


둔덕 위에 자리하던 성채는 지질 변화에 따른 자연의 산물로 형성된 높고 가파른 지형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지대 평원의 가장자리나 지형이 융기에 의해 돌출된 언덕 또는 바위산 꼭대기에 온전히 인간의 힘만으로 지은 성채들이 들어섰는데, 높이가 4에서 15미터에 달하는 뗏장을 섞은 흙 둔덕을 층층이 겹쳐 쌓아 올려 그 위에다 지은 성들이 대부분입니다.


성은 적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최후의 피난처였기에 성 바깥쪽에다가는 고정된 다리를 설치했죠. 다리를 이용해야 만이 성안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위급한 경우에는 다리를 무너뜨려 공격해 오는 적의 진입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이점이 그와 같은 발상을 낳았습니다.


요새 꼭대기를 뒤덮은 나무로 만든 망루는 말뚝 울타리로 둘러쳤습니다. 망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죠. 망루가 여러 다양한 크고 작은 형태로 제작되었던 까닭은 우선 작은 망루들은 적을 감시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고, 크기가 엄청난 망루들은 영주의 거처이자 피난처로 사용하고자 한 이유에서 입니다.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던 요새들이 11세기에 와서 다양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징후에 해당하는 커다란 동종(donjon)들은 돌을 쌓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사각형의 구조로 세워졌으며, 특정의 장소에서는 봉건시대 초기에 나무로 지은 탑 또는 망루와 같은 형태로 지었습니다.


이처럼 돌로 지은 동종은 공사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는 하였으나 화재 발생 시에는 그 피해가 극히 미미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높이가 20에서 40미터에 달하고 층계를 통하여 위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는 3층에서 4층 높이로 지은 까닭이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서쪽 지역과 루아르 강 계곡을 특정하여 살펴보면, 앙주 백작인 훌끄 네라(987-1040)가 소유하고 있는 영지의 지상에 세워진 동종과 같은 형태의 요새가 루덩과 몽바종 그리고 로슈에도 들어섭니다.


이처럼 돌로 지은 동종으로의 급격한 변화는 노르망디와 영국을 동시에 석권한 정복왕 기욤(1035-1087)이 런던에 지은 백색 탑과 역시 프랑스 미디 지역에 세운 동종의 영향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지은 동종은 루덩에 들어선 동종과 같은 형태로 3층에서 4층 정도의 높이에 측면의 길이가 10미터를 넘지 않는 감시 기능을 갖춘 망루와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는 탑으로 구성되었죠.


압도적 이리만큼 웅장한 동종도 등장했는데 노장 르 로트루에 세워진 동종은 높이가 25미터에 달하고 너비가 20미터에 이르는 두껍고도 튼튼한 벽을 갖춘 요새입니다. 동종 안에는 영주의 처소도 마련하였습니다.


노장 르 로트루(Nogent-le-Rotrou) 성. 뒷부분 사각형 건물 몸체가 영주가 거주하던 공간인 동종입니다.


이 시기에 지어진 동종들은 간혹 흙구덩이를 깊이 파고 만든 외호(해자)가 둘러싸고 외호 밖 경사면엔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거나 같은 방법으로 돌로 울타리 벽을 쌓은 형태입니다. 입구는 들어 올릴 수 있는 고가사다리를 통하여 2층으로 들어서도록 고안되었죠.


2층은 일반적으로 영주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설계하였습니다. 오르내리는 계단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위험한 상황을 고려하여 안으로 접어들일 수 있는 사다리나 구름다리 형태로 설치하였습니다. 겉치레로 지은 지상층은 창고로 사용하기도 하였죠.


로아레(Loarre) 성, 아라곤(Aragón).


이러한 동종들은 ‘로마네스크 성채’를 예고하는 건축물들에 해당합니다. 전체를 다 돌로 지은 요새가 등장한 때는 11세기말입니다. 양질의 노동력, 즉 고급 노동력이라 할 수 있는 장인들과 목수들, 돌을 자르는 석공들, 돌을 쌓아 건물을 짓는 석수들을 쉽게 동원하면서부터였죠.


아주 부유한 영주들의 소유물이었던 성들은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에 동시 다발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증가는 대륙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지조흐, 아흐끄 라 바타이유, 활래즈, 캉 등, 요새와 같은 성채는 거대한 동종과 그 둘레를 돌로 쌓은 방어벽으로 둘러친 형태였습니다.


지조흐(Gisors) 성, 오뜨 노르망디(Haute-Normandie).
아흐끄 라 바타이유(Arques la bataille) 남동쪽 요새 성벽.
활래즈(Falaise) 동종(Dojon).
캉(Caen) 성벽.


이중으로 둘러친 성벽 역시 돌로 축조했습니다. 성벽에는 견고한 문들이 설치됐고 문들 양 측면에는 망루들이 자리했죠. 이는 성 안에 위치한 가옥들과 부속건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옥들, 성당, 곡식 창고, 마구간들, 무기 제조 창고들, 공방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동종의 설계는 12세기 내내 성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들어선 주탑(동종)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갑니다. 프로뱅에서는 8 각형의 커다란 탑과 측면에 세워진 네 개의 작은 망루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150-1180년경). 우당에는 원통형의 주탑과 측면에 들어선 네 개의 작은 망루들 역시 확인됩니다(1160년경). 에땅프에서는 네 개의 낱장으로 된 설계도면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1130-1150년경).


12세기 말은 사자왕 리샤르가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입니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에 루앙 상류지역인 세느 강가에 우뚝 세워지는 샤토 갸이야르(Château-Gaillard)는 복잡한 설계로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방어를 목적으로 한 가장 혁신적인 요새였습니다. 돌로 쌓은 꽃 줄 모양의 레이스 형태로 둘러쳐진 방벽은 12세기의 플랑타쥬네 왕국의 군사건축물의 끝판과도 같은 정수에 해당합니다.


12세기의 플랑타쥬네 왕국의 마지막 요새였던 샤토 갸이야르(Château-Gaillard).


필립 오귀스트(1180-1223)는 자신의 치하에서 프랑스 왕국을 확립하고 이를 견고히 하는데 박차를 가합니다. 마침내 그는 1204년 노르망디 왕국을 정벌하고 같은 해에 영국왕과 동맹관계를 형성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플랑드르 백작, 이 세 사람이 일으킨 전쟁인 부빈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둡니다. 이로써 프랑스 왕국의 군주가 그 수많은 요새들을 감시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때부터 새로 지어지는 모든 성채나 요새들은 한결같이 루브르의 동종이 암시하듯 원통형의 거대한 탑이 중심에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사각형의 방벽이 둘러싸며, 네 방향의 꼭짓점엔 둥근 형태의 작은 망루가 자리하는 형태로 변화해 갑니다. 필립 오귀스트 국왕은 옛 건축물들을 개축하면서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쪽으로 이를 적절히 변형시켜 나갔죠. 이는 12세기 후반 내내 이루어진 요새들을 포위 공격하면서 획득한 기술들을 축적해 점차로 발전시킨 결과입니다.


이 오래된 로마네스크 성채들은 ‘수동적인 방어’에 치중한 결과 점점 방벽은 두꺼워지고 동종 역시 육중해지면서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자리 잡아가지만, 결국 ‘능동적 방어’를 선택한 ‘고딕 성채’에게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고딕 성채는 정확한 기하학적 설계에 따른 가장 압축된 형태의 요새입니다. 이중의 방벽으로 둘러싸인 정 중앙 한가운데 주탑(성)이 돌출되게 자리 잡았으며 사각[1]은 제거되었습니다. 대신 성을 따라 빙 둘러친 방벽 위에 둥근 길을 내고 난간엔 흉벽을 뚫고 총안을 설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죠. 돌출총안들[2], 활 쏘는 구멍들, ‘입구의 작은 성채’, 이뿐만 아니라 쇠스랑, 도살용 도끼, 도개교[3], 빛을 끌어들여 환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벽에 낸 폭이 좁은 작은 창문들은 성들을 지키는 수비대들로 하여금 적들이 공격해 올 때마다 성을 지키기 위한 효과적인 대응 수단으로 작용하였습니다.


11세기 노르망디 공국 정복왕 기욤(윌리엄)에 의해 처음 지어진 캉(Caen) 성채는 이후 고딕 시기에 와서 필립 오귀스트에 의해 완벽한 요새로 변형됩니다.




[1] 사각이란 총포의 사격 거리 내에서 탄환과 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일컫습니다.


[2] 돌출총안이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들에게 돌 포탄을 퍼붓고 펄펄 끓는 송진이나 돼지기름을 쏟아붓고자 성벽에 설치한 엄호물에 낸 구멍을 가리킵니다.


[3] 도개교는 다리 밑을 큰 물체가 통과할 수 있도록 다리 한쪽 끝이 들리도록 만든 다리를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