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181화
[대문 사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힌 휄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이 1902년도에 그린 옹플뢰르 해안길
빌레흐빌(Villerville)
옹플뢰르에서 시작하는 해안은 투르빌과 도빌을 거쳐 꺄부르 마을에 이른다. 노르망디를 여행하는 이들이 몽생미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이곳, 이름하여 꼬뜨 드 흘뢰리(Côte Fleurie), 뜻하는 바로는 ‘꽃 피는 해안’이라 부르는 바닷가에 연이어 쭉 들어선 마을들이다.
옹플뢰르에서 투르빌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길이 좁아 오가는 차량 때문에 산책 삼아 걸어가기 쉽지 않고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그나마 수월한데, 길을 가다 보면 자그마한 마을들을 지나가게 되고 오르막 내리막 시골길은 묘한 정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마을을 에둘러 가는 길은 산뜻하기만 하다. 저 코트 다쥐르(côte d’azur)의 알프스 단애 끝 마을들에 걸쳐있는 눈부신 해안길과는 대조적으로 소박하면서 차분하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그 한가운데 위치한 마을이 빌레흐빌(Villerville), 이 조그만 마을은 점묘법 화풍을 처음으로 시도한 선구적 예술가의 화폭에서 영원한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바다를 면한 시골길은 옹플뢰르 주변의 숲 속에 난 길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다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바로 도빌의 백사장으로 달려가겠지만, 시골길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길 위에서 칼바도스의 정취 가득한 시골 풍경을 끌어안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길가의 목초지엔 아직도 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이 구축한 참호나 벙커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전쟁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공장 굴뚝들만 아니라면 바다 너머로 아스라이 보이는 르 아브르 항구도 푸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처음 이 해안길을 자동차로 달린 뒤로 봄만 되면 파리 아파트 유리창 너머로 푸르른 목초지 사이로 난 길을 달리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건지, 바다가 나를 부르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난 바다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바다를 즐겨 찾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길을 알고부터 가끔씩 이 길을 차로 달리곤 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결혼기념일에 파리를 찾은 지인이 이 길을 마지막으로 갈라섰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이 길이 ‘이혼의 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자동차로 달려가며 유쾌했고 행복했고 즐거웠다. 길가의 마을들마저 인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농가 펜션들도 한번 묵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갈하게만 다가왔다.
길 주변에 유난히 양로원이 많다는 것은 기후가 좋고 공기도 맑고 전망도 좋다는 뜻 아닐 것인가. 오죽했으면 인상파 화가 마네의 주치의가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는 화가더러 이 인근의 휴양지에서 푹 쉬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내렸겠는가.
마네만이 아니라 꽤 많은 화가들이 이 길을 산책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31살이란 짧은 생을 살다 간 조르쥬 쇠라 역시 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 중간쯤에 위치한 빌레흐빌(Villerville) 바닷가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나는 쇠라의 그림이 참 좋다. 뉴욕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까지 찾아가서 직접 본 그림은 아니지만, 그가 그린 빌레흐빌에 갈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화폭에 담은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수많은 점을 찍어 완성한 풍경, 쇠라는 여름철마다 이곳 노르망디를 찾아와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 바로 이 그림이다. 그림처럼 빌레흐빌 마을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림 속 바닷가 풍경 그대로다.
과학자 같은 면모를 지닌 젊은 화가는 풍경만이 진실하다고 믿은 것일까? 빌레흐빌 바닷가 풍경은 그가 화폭에 담은 풍경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독자들은 그가 그린 화려한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그림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화려함보다는 이 조용하고 덧없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의 바닷가 풍경에 마음이 더 이끌린다. 왜 그럴까?
파리에서 2시간 넘게 달려온 우리 부부가 평온한 행복감에 젖어든 순간이 이 ‘꽃 피는 해안’에서였고. 처음 빌레흐빌 마을에서 맞은 대서양의 저녁노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떠나는 여행은 화려하고 번잡한 곳보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장소를 더 자주 찾아간다는 사실이 차라리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노르망디 공국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다니는 여정은 그래서 더 뜻깊다. 이미 사라진 왕국을 글로 복기한다는 것, 많은 화가들이 그린 풍경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 결코 피곤한 일이 아니다.
여행하는 부부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다가와서는 인사말을 건네는 노르망디 주민들은 우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한번 대화를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어디 가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전망 좋은 곳은 어디인지, 역사적 기념물이 어디에 있는지 노하우를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 팁까지 챙겨준다. 그들 말은 틀린 데가 없다. 정직한 노르망디 인들,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이 풍경처럼 진솔하다고 믿는 것이다.
어둠에 잠기기 전에 마을의 유일한 교회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마을의 중심은 성당이고 더군다나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니 그저 스쳐 지나가기엔 안타까운 일이다.
채광탑이 노르망디-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술의 웅장함을 바라보는 이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그 아득한 시기에 바닷가 벽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이들의 믿음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말고도 바닷가 마을들 공통적으로 바다에 대한, 자연에 대한, 폭풍우로 인한 난파의 위험성에 대한 인간 본연의 두려움이 작용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모승천 성당>은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절대 믿음의 증표처럼 다가온다.
내부의 단출한 회중석 구조는 마을의 주민 숫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 많지 않은 인구로 인해 건물은 확장되지 않은 채 오래 전의 자그마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득한 시절에 기울어져가는 시골집에서 살면서 그들이 바라봤을 거대한 크기의 성당을 오갈 때마다 그들은 어떤 신비한 기운을 느꼈고 영성에 의한 기도의 힘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영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신앙의 견고함 속에 살았던 믿음은 오늘날까지 교회를 남게 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라도 그들의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곡해하고 싶지는 않다. 이 점이 내가 시골 교회까지 찾아다니는 이유다.
죽음 앞에서, 새로운 탄생 앞에서, 두 남녀의 화혼을 지켜보면서,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들은 교회 문턱을 넘나들며 세속과 성소를 오가는 가운데 십자고상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무던히 갈구하면서 새롭게 거듭나길 꿈꿨던 그들의 갈망이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고 싶어 한 화가의 열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내 믿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순수한 열정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라고만 생각한다. 자그마한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얻은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