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살던 집에서 식물을 키운 적이 있다. 꽃집에서 산 작은 화분 하나와 마트에서 산 저렴한 바질을 키웠다. 꽃집에서 산 화분은 오래갔지만, 마트에서 산 바질은 두 번 따먹고 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결국 버리고 또 사는 일이 반복됐다. 가을과 겨울이 항상 고비였다. 독일의 가을과 겨울은 해가 잘 나지 않고 습하다. 게다가 우리 집은 북향이라 상황은 더 심각했다. 힘들게 키우던 식물도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식물이 죽으면 마음이 아팠다. 모든 게 내 책임인 것 같았다. 내가 물을 너무 많이 준 건지, 너무 안 준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을 덜 줘서 그런 건지...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다른 독일 사람들은 식물을 잘 가꿨기에 내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식물을 버렸어도, 봄이 오면 시장에 가서 작은 화분을 또 사곤 했다. 집에 작은 테라스가 있었고, 독일의 봄과 여름은 길고 해가 많이 나니 식물이 잘 자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집 안에 사람 외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집을 더 따뜻하고 생기 있게 만들어 행복했다. 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물을 주며 테라스의 햇빛이 드는 쪽으로 화분을 옮겨주기도 했다. 따뜻한 햇빛을 많이 받고 무럭무럭 자라라고 식물에게 자주 말을 건넸다. 새싹이 조금이라도 돋아나면 얼마나 기특하고 신기한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며 식물을 칭찬했다. 여름에 바질을 키우며 바질 잎이 풍성해지면 바질 샐러드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새로 구한 집에서도 작은 화분 몇 개를 사서 키웠다. 집에 화분이 몇 개 있으니 집안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잘 키우리라 다짐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찾아보고 신경도 많이 썼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식물이 있었다. 매일 보던 식물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잎이 시들거나 초록색 뿌리가 노랗게 변했다. 속상하고 식물에게 미안했다. 반면, 쑥쑥 잘 자라는 식물도 있었다. 그런 식물을 보면 고마웠다. 많이 신경 쓰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잘 자라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한국에 온 지 1년이 지나고 여름이 끝나갈 즈음, 크게 자란 식물들을 분갈이해 주었다. 남편이 큰 화분과 흙을 사 왔다. 작은 화분에서 식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새로운 화분에 흙을 넣고 중앙에 잘 자리 잡게 한 후, 나머지 흙을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큰 화분에 옮기니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더 커 보이고 더 예뻐 보였다. 식물들은 더 크고 싶었을 텐데 작은 화분에 갇혀 크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옮겨줄 걸, 얼마나 답답했을까? 더 클 수 있었던 것을 내가 막고 있었다는 생각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우리의 삶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면, 내가 더 크기를 원한다면 분갈이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크고 깊은 화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