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여행 넷째 날(2023년 2월 24일 금요일), 오늘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온천하러 가는 날이다.
겨울의 타이베이는 대체로 음습하다. 부슬부슬 비도 잦은데 습도마저 높다. 여행 중 날씨 운이 좋지 않아 기온이라도 낮아지면 큰일이다. 습한 추위에 뼈가 시리기 때문이다. 이럴 땐 온천이 명약이다. 타이베이 근교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양밍산, 우라이, 베이터우가 있다. 그중 베이터우는 전철로 이동이 가능하여 많은 타이베이 시민들과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나 역시 겨울철에 타이베이에 오면 꼭 한 번씩 베이터우에 들려 온천물에 몸을 담근다.
이번에도 여행 출발 전에 '베이터우(北投)'에 있는 '더 가이아 호텔'의 '2인 프라이빗 온천탕 90분+런치' 상품을 예약했다. 무려 158,000원을 지불하고 말이다. 온천은 해야겠는데, 딸아이나 나나 예민하고 불안을 잘 느끼는 성격인지라 대중탕에서는 편안하게 온천을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큰맘 먹고 결재했다. 온라인 대만 여행 카페의 정보에 따르면 방역 봉쇄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탕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예민한 딸아이와 나 자신을 위해 얇디얇은 지갑 사정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편안함을 사기로 했다.
빨간색 R라인의 전철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창밖의 풍경이 달라진다. 평지인 타이베이와 달리 여기저기 솟은 높은 산자락을 보고 있자니 대성리로 가는 경춘선 안에 있는 듯하다.
"덜컹 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사는지."
노래 한 자락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베이터우 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베이터우 역
"목욕탕 냄새나는 것 같지 않아?"
전철역에서 나오니 목욕탕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딸에게 물어보니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후각이 몹시 예민하여 '개코'라는 별명을 가진 딸아이가 그렇다면 진짜 그런 거다. 목욕탕 냄새가 동네 전체에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셔틀버스 표지판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예약하지 않으면 호텔에 갈 때도, 목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탑승을 못할 정도였는데 이번엔 한 두 명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코로나 방역 봉쇄의 직격탄을 제대로 맞았구나 싶었다.
줄 선 사람 없는 셔틀버스 표지판
호텔에 들어서 체크인을 하려다 '더 가이아 호텔'의 중국어 이름이 '대지주점(大地酒店)'인 것을 발견했다. 중국에 방문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건물마다 주점(酒店) 간판이 붙은 것을 보고 "술집이 왜 이리 많은 거야?"라고 묻곤 한다. 하지만 酒店은 술집이 아니라 호텔이다. 나는 오히려 '대지(大地)'라는 글자를 보고 그제야 '가이아'라는 호텔 이름의 뜻을 알게 되어 무릎을 탁 쳤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신들의 어머니인 그 가이아였다. 여행 중에는 사소한 발견에도 큰 기쁨을 느낀다. 딸에게 이 깨달음을 얘기해 주었으나 반응이 미지근하다.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데 그것도 나의 즐거움에 공감할 수 있을 때 가능한가 보다. 호텔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된 것이 그리 즐거울 일이냐는 듯한 딸아이의 표정에 나 혼자 샐쭉해지려는 찰나, 자신을 따라오라는 직원의 말에 후다닥 가방을 챙겨 들었다.
더 가이아 호텔 로비
설레는 순간이 있다. 영화관이나 공연장에서 시작 전 암전의 시간,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을 들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직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비행기 이륙 전 엔진 소리가 부아앙 커지는 순간, 그리고 바로 지금, 프라이빗 온천룸 문을 열기 바로 직전!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대나무로 조경된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청산~~~이~~~" 노래가 절로 나온다. 물론 항상 "청산이"까지다. 그 뒤 가사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몸이 절로 녹는다, 녹아. 뜨거운 물 안에서 시원한 탄산수를 마시는 것도 좋고, 침대에서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먹는 것도 좋다. 시원한 맥주 한 캔 사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 90분은 너무 짧다. 몇 번 탕을 들락거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1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슬슬 샤워하려고 샤워꼭지 물을 틀었는데 물이 졸졸 나온다. 욱! 하려는 순간 '긍정 세포'가 일을 시작했다. '물이 똑똑 나오지 않는 게 어디야!" 평소답지 않게 착한 생각을 한 후 방법을 찾았다. 콸콸 나오는 욕조의 수도꼭지 물을 틀어 바가지로 머리와 몸에 끼얹어가며 샤워를 마쳤다.
좌: 온천 박물관 , 중: 베이터우 시립 도서관, 우: 신베이터우 선 전철 내부
이제 밥 먹을 차례다. 호텔 식당에서 큰 그릇에 조금씩 담겨 차례로 나오는 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올 때는 베이터우 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왔지만 돌아갈 때는 온천 박물관과 베이터우 시립 도서관을 구경하고 슬슬 걸어 신베이터우 역까지 가기로 했다.
온천박물관은 대만 전통 목욕탕을 재현하여 목욕 문화를 소개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대만 전통 목욕 문화란 일본의 영향을 받은 목욕문화를 말한다. 입구부터 신발을 벗고 직접 신발을 들어 신발장에 넣으라고 안내를 한다. 박물관 자체가 목욕탕 콘셉트이다. 내부를 돌아보고 나서야 우리나라의 목욕 문화 역시 일본의 영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베이터우 시립 미술관은 도서관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내부에도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대만의 광주사태라 할 수 있는 228사태를 기리는 기념관을 가야 했기에 부득이 외부에서 사진만 찍었다.
타이베이로 돌아가기 위해 신베이터우 역에서 베이터우 역까지 한 정거장 운영하는 전철을 탔더니 온천 콘셉트의 실내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