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그렇게 돈을 벌죠?
어려서 돈맛을 알았다고 하면 일찍 세상 물정 깨우친 깜찍한 아이로 보이겠지. 그냥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스무 살 갓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졸업 때까지 대학 생활의 꽃이라는 미팅 한번 못했다. 평일이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녹즙 배달을 했고, 저녁에는 미팅 족들이 모이는 종각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했다. 틈틈이 과외도 했다. 아빠 다음 알게 된 남자가 남편이었다. 엄한 아버지와 달리 세심하고 따뜻한 그가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모아놓은 돈도 없이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으며 결혼을 했다. 스무 세 살 때였다.
사랑스러운 딸을 얻은 기쁨은 잠시였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혈관이 좁았다. 폐동맥 판막 협착증이라고 했다. 그 작은 팔에 링거 주사를 꼽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여덟 달 내내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는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 슬픔에 잠길 여유도 없었다. 아이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많은 빚을 졌기 때문이었다.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었다.
둘째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키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태교 기간 내내 채권단들의 소나기 같은 빚 독촉 속에서 마음 아프게 아이를 낳아야 했다. 아이에게 빚만은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살아낸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 선물은 없었다. 공짜도 없었다. 어느 날 둘째의 놀이방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종서가요... 친구들한테 계속 돈을 달라고 해요.”
너무나 놀라 하원 한 아이에게 왜 그랬는지 물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엄마한테 돈 주면 엄마 회사 안 가도 되잖아.”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며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남편의 실직까지 겹쳐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을 쉴 수 없는 현실은 나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일은 힘들어도 시간 대비 수입이 높은 부동산 분양 전문가로 경력을 쌓았다. 고객들은 박병주 본부장을 줄여 박본! 박본! 이라 불러주었고, 고객 눈 높이로 딱딱 맞춤 상담을 해주는 나를 신뢰해주었다. 통장 잔고가 걱정 없을 만큼 돈도 따라왔다. 그제서야 번아웃이 왔다. 쉬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