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이 슬램덩크가 영화로 나왔다고 이야기할때만 해도 나는 시큰둥했다. 이미 TV애니로 충분히 실망하기도 했고, 뭐 그리 새로운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여동생은 그 영화반응이 정말 좋다며 만화책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다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감독이 그 만화가더라. 이노우에 다케히코.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20여년전 그 만화에 빠져 열광했던 나의 20대가 기억났다. 만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누구든 슬램덩크를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고, 그 당시 일본만화를 휩쓸던 스포츠만화 중 슬램덩크는 가히 독보적인 작품이었다. 그림 퀄리티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발군이었고 특히 작가의 농구에 대한 진심이 엄청 느껴졌던 그 작품. 나는 슬램덩크를 보면서 무조건 이노우에는 농구 관계자거나 전직 농구선수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슬램덩크가 보여준 농구 디테일은 엄청났다. (최근 영화개봉을 앞두고 한 감독인터뷰에서도 이노우에는 영화 관계자들이 농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함)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극장에 가는 일은 1년에 1번이 될까 말까할 정도로 드물며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드라마를 보면 봤지 영화는 잘 보지 않는다. 2시간동안 집중해서 뭔가를 보는것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니라 1시간 정도의 길이인 드라마를 외려 선호한다. (절대 드라마를 몰아서 보는 타입도 아님) 그런 내가 영화를 보자고 하자 영화광인 남편과 아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다행히 슬램덩크는 미성년자도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가족들이 함께 영화 나들이에 나섰다. 처음 영화가 시작했을 때 그림 실력은 그저 그런데...? 라며 약간 실망했던 것도 잠시, 그간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BGM과 함께 등장한 북산고 5인방의 모습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나만 그런건 아니었던 듯. 다른 사람들의 후기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 만화의 주인공은 강백호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송태섭이다. 송태섭이 주인공이 되면서 슬램덩크 특유의 코믹함은 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영화에서 강백호가 나올때마다 관객들은 빵빵 터진다. 실제로 슬램덩크 만화책을 본 적이 없었던 아들 녀석은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강백호를 꼽으며 강백호 대사나 행동(영감님 턱을 치는 장면 등)을 따라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산왕공고와의 농구경기가 영화내내 그려지는데 (그 농구경기 하나만 나옴. 다른 농구경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아는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땀을 쥐게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노우에가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인줄 알았던 내가 틀렸다. 그는 천재 연출가였다. (그야말로 그림실력은 거들뿐!) 이노우에가 BGM을 활용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많은 감독들이 BGM을 이용해서 영화를 멋지게 연출하는데, 이노우에는 반대로 정적을 이용해서 모두의 집중을 이끌어 낸다. (그는 관객들을 극도의 텐션속에 밀어넣는 생각지도 못한 연출기법을 보여준다) 내가 슬램덩크에서 젤 좋아하는 인물인 서태웅이 영화에서 개인적 스토리가 잘 조명되지 못한게 좀 아쉬웠고 강백호랑 둘이 앙숙인 부분, 정대만이 왜 농구를 그만두고 불량스럽게 되었는지의 이야기가 불충분하다보니 영화로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엥? 하는 부분 역시 분명히 있었을 것 같다. 개개인의 이야기에 비해 농구시합 장면은 정말로 충실히 그려진 것 같고 어느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약간 스포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송태섭이 '살아있는게 나라서 죄송하다'고 글을 썼다 지우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나이가 든 탓인지 북산5인방보다는 어른들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하게 된 측면도 있었다. 어렸을때는 몰랐는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 보다는 감추는데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1도 숨기지않는 강백호라는 존재가 얼마나 신기했을지는 두말하면 입아프고, 왜 송태섭이 다른 경기보다 특히 산왕과의 경기에 그렇게 집착했었는지의 이유도 잘~ 나온다. 경기를 보다보면 소위 전문가들이 말하는 흐름의 변화를 일반인들은 잘 캐치하기 힘든데 영화에서는 그 변화를 정말 잘 설명해주었고 채치수가 산왕고의 센터에게 기가 눌리며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심리상태, 서태웅이 상대편 에이스 (정우성)에게 납작하게 눌리며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졌다가 패스를 하면서 (서태웅이 패스를 한다며 모두가 깜짝 놀라는 장면 역시 잘 표현됨 - 이노우에는 그런 장면에서 만화기법을 매우 적절하게 활용한다) 한 단계 성장하는 부분 역시 잘 나왔다. 영화를 n차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나 역시 슬램덩크를 볼때마다 새로운게 보이고 새로운 걸 느끼게 될 것 같은 마음이다.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집에 처박아 두었던 슬램덩크 만화책을 다시 끄집어 냈고 남편 역시 환호했다. 슬램덩크는 만화책 역시 20여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그림체며 내용이 너무 완벽하다. 멋진 작품은 시대를 가리지않는다더니 정말 그러한 듯. (앞으로 이 영화를 보실 분들께) 한 가지만 더 당부하자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반드시 자막이 아니라 더빙판을 보아야 한다. 자막이 있으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그림체를 가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강백호, 채치수, 서태웅, 송태섭, 정대만의 이름이 일본어로 불리면 그 낯설음때문에 우리가 예전에 느꼈던 그 감정과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빙판을 골랐고 나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상영관에도 어른들이 가득했다. 아직은 자막판이 더빙판보다 많아 시간대가 좋지 않지만 극장 관계자들도 곧 더빙을 하는 상영관을 크게 늘릴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을 해보라! 누가 슬램덩크를 일본어로 듣고 싶어하겠는가?!) 물론 No!Japan! 인데 슬램덩크를 보러 간다며 주변에서 안좋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조금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슬램덩크에 얽힌 30-40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슬램덩크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오, 청춘의 흔적이니까.... 요즘은 무조건 30-40대를 잡아야 롱런이 된다고 하는데 슬램덩크는 장기간 흥행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