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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Mar 17. 2022

피아니스트

내 인생을 통털어 정말 잘한 일을 몇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는 피아노를 그만 둔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100% 진심이며 만약 내가 피아노를 계속 했으면 어땠을까 라고 상상이라도 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피아노는 나에게 사랑이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이다. 능력이 부족하여 가질 수 없었던 사랑이다.


엄마는 그당시로서 흔치 않았던 직장 여성이었기에 내가 방과 후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고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매일 레슨이 있는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피아노가 목적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퇴근해서 돌아오실 때까지 시간 때우기가 목적이었기에 진도 따위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중 집에 피아노가 없는 아이도 나 뿐이었다. 나는 피아노도 그럭저럭 칠만 했지만 피아노 학원에 있던 동화책 전집에 훨씬 마음이 가 있어서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나면 학원에 남아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다가 오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원을 옮겼는데 원장 선생님이 부산대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을 한 분이셨다. 동네 피아노 학원 강사나 원장 중에 전공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분께서 처음으로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다. 집에 피아노도 없는 아이가 매일 연습하고 오는 아이보다 습득력이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가르치는데로 치기만 하는데 나는 피아노를 치면서 혼자 감동도 하고 흥도 내고 선생님이 물어보기도 전에 어느 부분의 화음이 이러이러해서 좋았다며 선생님을 붙들고 재잘재잘 느낌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를 동원해 음악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이었다. 새로 배우는 악보를 보자마자 바로 치는 초견이 특히 우수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나 나나 피아노는 방과 후 시간 때우기였다. 여전히 피아노도 없이 학원만 왔다갔다 하다가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야 피아노를 마련했고 중3이 되어서 갑자기 예고 시험 한번 볼까 생각이 들었다.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으로 옮기고 주1회 서울대 교수의 개인 레슨을 받았다. 교수님이 또 한번 나의 재능에 감동하셨다. 이렇게 빠른 아이는 처음 보았다며 레슨 때마다 당신께서 더 재미있어 하셨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은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전공할 목적으로 교수 레슨을 받으며 입시 위주로 실력을 키워온 아이들에 비해 체계적인 레슨을 받아본 경험도 없고 레퍼토리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예중을 나온 아이들과의 10년 격차를 예고 시험까지 남은 7개월 동안 어떻게든 따라잡아야 했다. 그 당시 예고 합격생의 80%가 예중 출신이라고 했다.


서울 예고에 응시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떨어졌다. 실기를 마치고 나오면서 떨어졌구나 이미 알았다. 아니, 치는 도중에 이미 느낀 것 같기도 했다. 지정곡이었던 베토벤 소나타 16번 1악장과 쇼팽 에튜드 작품 10의 12번은 그 이후로 30년 가까이 쳐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한번 쳐보니 몸이 대충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 연습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고1때 미국으로 간 뒤에도 School of Art 수업과 교수 레슨을 병행하며 음대 준비를 계속 했다. 여러 교수들로부터 받은 평가도 대체로 비슷했다.


1) 재능이 있다.

2) 너무 늦게 시작했다.

3) 연습 부족이다.


2년 정도 음대 준비를 하다가 나는 돌연 부모님께 더이상 피아노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느 순간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들의 평가는 대부분 비슷했지만 내가 본 나 자신은 1번 항목 "재능이 있다"에서부터 이미 한참 동떨어진 수준이었다. 재능과 습득력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준비한 아이들을 금방 따라잡았다고 칭찬받으며 우쭐해하는 마음이 컸는데 어느 순간 내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다른 아이들과의 격차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굳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잡아 비교할 생각이라면 아예 큰 물에서 비교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예프게니 키신같은 천재 피아니스트와 말이다. 키신은 12살에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쇼팽의 콘체르토를 연주하고 있는데 18살이나 먹은 내가 다른 입시생들을 뛰어넘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진짜 재능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명문 음대에 가는 것이 목표였던 입시 위주의 안목에서 갑자기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피아니스트가 될 재능같은 것은 없다.













세계적인 화재였던 키신의 CD를 구입한 뒤 정말 닳고 닳도록 들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유튜브에서 그당시의 실황 영상을 발견했다. 기교도 기교지만 열두살짜리가 어떻게 저런 감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다. 그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피아니스트도 당연히 시인이 되어야 한다. 저런 기교, 저런 감성이 진정 피아니스트의 재능이다.




https://youtu.be/gilNaeUsPNQ





조카가 올해 서울 예고 미술과에 합격했다. 미술을 시킬 생각도 없어 고작 몇개월 미술 학원 다녀본 게 다였는데 뜻밖의 재능이 보였다. 예술가의 길이 험난하기도 하거니와 뒷바라지 할 능력도 없다며 집안에서는 말렸지만 어찌어찌 혼자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보더니 떡하니 붙어버렸다.


뜻밖의 선전에 고무된 아이 엄마는 미술가 뒷바라지를 할 생각에 걱정 반 흥분 반으로 들떠 있었는데 정작 아이는 겨우 한학기를 마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미술을 그만 두겠단다. 얼마나 확고한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자는 엄마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아빠와 둘이 가서 덜컥 자퇴서를 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내가 물어본 것은 단 하나였다.

"아이 스스로 느끼고 결정한 것인가?"

대답은 그렇다 였다.


예술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니,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면 예술일 수가 없다. 내가 피아노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어느날 갑자기 느꼈고 내게 재능이 있다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도 아랑곳 없이 하루 아침에 피아노를 버린 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후회를 하지 않은 데에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난 조카도 분명 그것을 느꼈을 거라 본다. 그리고 아이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연히 보게 된 이 그림은 진화론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하는 나도 웃게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최상의 단계는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모습이라고 믿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그만 둔 뒤, 여태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손쉽게 학점을 딸 수 있는 과목이라는 얍삽한 판단도 들어 피아노를 부전공으로 택했다. 부전공에 필요한 피아노 실기 수업을 들었을 때도 교수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었다. 재능이 있는데 왜 전공을 하지 않느냐고.


내가 가진 피아노의 재능은 나에게 피아노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아본 안목이다.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인 예술인의 단계에 도달하는 길은 부족한 재능으로 고뇌하고 번민하며 전문 음악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 수준에서 부담없는 즐거움으로 음악을 대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가장 사랑한 피아니스트다. 그는 쇼팽의 귀재로 불려서 쇼팽의 에튜드 전곡을 연주하고 앨범을 내기도 했는데 입시곡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곡이 쇼팽의 에튜드인지라 그의 앨범은 입시생들에게는 교과서고 정석이었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꿈꾸는 두개의 무대가 쇼팽과 차이코프스키 콩쿨이다. 이 콩쿨에 입상하는 순간 피아니스트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찬란한 미래를 보장 받는다. 그만큼 쟁쟁한 음악가들이 다 모이지만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다. 참가자 중 제일 잘했어도 1등 할 만한 평가를 못 받으면 1등없이 대회가 끝나는 냉정한 경연이다. 2015년에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쿨 1위를 차지해 문화계에 난리가 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https://youtu.be/LhZGYs1z2mQ







그렇게 엄청난 대회에서 아쉬케나지는 무려 쇼팽 콩쿨 2위, 차이코프스키 콩쿨 1위를 수상했다. 실력으로도 이미 넘사벽인데 그가 특별한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 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이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 편하게 아는 척 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열심히 피력한 인물이다. 아직까지도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드레스가 보편적인 클래식 무대에 평상복을 입고 오르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88Me5TpYo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니 평상복이 아닌 속옷을 입고 나와도 뭐랄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그의 그런 허물없고 소박한 행동은 더욱 격렬한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80대의 나이에 아직도 지휘자이자 음악 감독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내게 음악을 연주하는 것만이 재능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도 재능이라는 것을 알게해 준 사람이다. 그 유명한 공자님의 말씀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자왈: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아는 자가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가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이 말은 피아노를 그만 두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인용했던 구절이기도 하다. 약간은 건방지게 인생 통달한 듯한 말투로.












그러므로 예술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일은 키신과 아쉬케나지와 조성진에게 맡기고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런 천재들의 재능 덕분에 귀가 즐겁고 삶이 풍요로워 짐에.

공연장에서 핸드폰을 끄지 않는 행동은 청중으로서 최악의 무매너인데 그런 상황을 재치있게 넘긴 바이올리니스트의 영상을 보며 진정한 실력가, 예술가가  주는 감동과 위트를 다시 한번 느껴 본다.

설령 위에 링크한 유튜브 영상들은 그냥 넘겼을지언정 아래의 영상은 한번 감상해보길. 진짜 예술가의 재치와 여유를 만끽해보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에 끊임없는 예술의 기쁨이 충만하길.



https://youtu.be/uub0z8wJf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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