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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미 Oct 23. 2018

거기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증거다 


어제는 종일 죽음을 찾아다녔다. 

해가 지는 종묘에서 슬픔만큼 굵어진 나무와 바람과 돌을 봤다.

굳게 닫힌 죽은 왕들의 문과 바람이 오가는 것 말고는 아무도 지나지 않던 신로도 봤다.

낮에 만난 소설가가,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곳이 종묘였어요. 라고 낮게 말해주었고,

나는 그 말을 믿고 곧장 거기로 찾아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종묘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성했다.

길고, 큰 시간이 거기 죽어 있었다. 

아니 살아 있었다. 

신로는 신의 길이기에 사람이 밟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신로인 줄 모르고, 어떤 신로를 밟아댔다.

그리고 돌아오는 내내 그 사실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죽은 사람은 아직도 산 사람을 지배한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정해놓은 법칙에 벌벌 떤다.





김수영 문학기행을 진행하기 전에, 김수영 문학지도를 따라 소설가와 시인과 평론가와 함께 서울 구석구석을 다녔다. 김수영 출생지라고 적힌 비석은 쓰레기통에 작게 표시되어 있었다. 나도 몇 번 걸어서 지난 적이 있는 종로 거리 한복판이었다. 


사실은 이 자리가 아니라 조금 더 들어가 저 거대한 영어학원 건물 어디쯤이었던 것 같아요.


평론가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때 지도를 들고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다.


한 블럭 옆으로 가니, 마리서사 자리가 있었다. 그곳 역시 열심히 가로질러 갔던 종로 거리였다. 이쯤에 마리서사가 있었다고 평론가 선생님은 팔을 옆으로 벌려 네모를 그렸다. 박인환 시인이 운영했던, 마리서사가 걸쳐 있었을 법한 자리엔 금은보석 판매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수영이 죽은 곳을 찾아갔다. 버스에 치인 김수영은 지금도 버스가 지나다니는 그곳에서 죽었다고 했다.. 버스가 쓰러진 김수영을 싣고 갔다고 인근 주민이 부인께 알렸다. 부인은 남편을 찾아 인근 병원을 헤맸다. 김수영이 1968년에 죽었으니 정확히 50년 전 일이다. 그 자리는 여전히 버스 정류장이고, 김수영의 집이었던 자리는 다른 모양이지만 여전히 집이고, 거기서 누군가는 버스를 타고 누군가는 자고 일어난다. 사람은 바뀌고, 집의 모양도 바뀌고 버스 모양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엔 다른 누군가 살고 있다.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버스를 타고 거기로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가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김수영처럼 살아간다. 


거기, 있었다.


그것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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