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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Mar 16. 2023

사르트르에 기대어 겐자부로를 읽다

오에 겐자부로『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2007)

사르트르에 기대어 겐자부로를 읽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이하 『애너벨 리』)에 대한 감상을 쓰기 시작한 오늘, 작가의 부고를 들었다. 88세였다. 영미문학 편애 독자로서 아시아권 문학에 대해 비교적 소홀했던 내가 이제 막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으며 감탄을 시작했는데, 그는 홀연히 떠나버리다니.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 많다는 데 위안받으며, 이 독서 노트를 애도의 마음을 담은 나만의 트리뷰트로 바친다.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쓴 『애너벨 리』는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도 실명으로 등장하며,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 펼쳐진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노작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 히카리와의 산책길에서 아들의 간질 발작증이 나타나 당황하고, 이 장면을 목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친구 고모리와 30년 만에 우연히 만난다. 그는 작가의 대학 동기로서 30년 전 자신에게 시나리오를 써 줄 것을 부탁했었다.


배우도 정해지고 내용의 골격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영화였다. 주연을 맡은 배우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 중인 여배우 사쿠라였다. 작가는 청소년기에 미국문화센터에서 그녀가 소녀였을 때 출연했던 영화 <애너벨 리>를 본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의 원작은 말 거간꾼에서 민중 봉기 지도자로 변신해 결국 처형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미하엘 콜하스』였다. 클라이스트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몇 개국의 감독이 원작을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 내어놓는다는 ‘M 계획’에 고모리가 일본판 감독으로 동참해 있었다.


작가는 고모리, 사쿠라와 의견을 교환해가며, 영화의 배경을 자기가 나고 자란 일본의 한 작은 마을로 정하고 그 마을 민중 봉기 지도자였던 ‘메이스케’ 설화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써나간다. 새로운 스토리 메이킹이 필요한 일이 아니어서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되리라 예상했던 시나리오 작업에 제동이 걸린 것은 주연배우 사쿠라가 내용에 간섭을 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시나리오 속 여자 주인공인 메이스케의 어머니를 남자 주인공의 보조 역할이 아니라 마을의 민중 봉기에 영감을 주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한 여성으로 재탄생시킬 것을 요구했다. 시나리오 수정에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사쿠라의 주장대로 방향을 잡아가던 중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본판 ‘M 계획’은 무산된다.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 만나게 된 두 사람. 작가는 노쇠했고 감독은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직 영화에 미련이 있는 사쿠라와 함께 다시 한번 ‘메이스케’ 설화를 영화로 제작해보기로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가의 여동생과 사쿠라가 되살려낸 설화 속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는 마침내 겐자부로, 고모리, 사쿠라 모두에게 치유의 감정을 선물한다.   

 

사르트르와 겐자부로


소설을 읽는 내내 사르트르를 생각했다. 겐자부로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며 쓴 이 소설은 사르트르에 대한 오마주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사르트르 철학의 주요 개념인 ‘앙가제(engager)’와 ‘프로제(projet)’가 작품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겐자부로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느냐며 그의 생애에 대해 찾아보는 순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겐자부로는 도쿄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으며 논문도 사르트르에 대해 썼다(「사르트르 소설에서의 이미지에 대해」, 1959). 또한 1966년 일본을 방문한 사르트르가 같은 해 방문한 비틀스만큼의 인기를 구가했다고 하니, 그즈음 30대에 접어든 겐자부로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디 겐자부로뿐이랴. ‘사상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렸던 사르트르가 당대의 사상가들, 작가들에 미친 영향은 방대했고 그의 실존주의 철학은 적극적인 수용과 적극적인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방인』,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경우는 사르트르와 친구로 출발했다가 적으로 끝난 경우다. 변광배는『사르트르 vs 카뮈』(세창출판사, 2020)에서 이 둘의 관계를 ‘프레너미(frenemy: 친구-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겐자부로에게 있어서 사르트르는 어떤 존재였을까. 평생을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며, 차별과 부당함, 과거사 정리에 대해 문학적, 정치적 목소리를 동시에 내어 왔던 작가에게, ‘행동하는 철학자’ 사르트르는 삶과 문학의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소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겐자부로의 작품들이 그 증거물이다. 이제『애너벨 리』를 통해 사르트르의 사상이 겐자부로의 소설 안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겠다.      


‘앙가제(engager)’해야 하는 문학


‘앙가제’는 ‘당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라는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engagement: 지식인의 사회참여) 사상에서 나온 용어인데, 겐자부로는 이 소설에서 세 가지 의미로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앙가제’해야 하는 문학의 책임이다. 레지스탕스 활동도 하고 수위 높은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사르트르 못지않게 겐자부로도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74년에는 솔제니친의 석방을 위한 성명서도 내었고, ‘오적’이라는 시를 써서 사형 판결을 받았던 우리나라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위한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런 그에게 문학이란 저 멀리 어딘가에 순수한 형태로 박제되고 보존되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시대의 목격자이자 준엄한 비판자로서 우리 곁에서 함께 행동해야 하는 문학의 소명을 깊이 인식하던 실천 문인이 바로 겐자부로였으며 이런 생각을『애너벨 리』에서도 밝히고 있다.     


“시인이, 그저 시를 썼다는 이유로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라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라에는 왜 그 같은 문학인이 한 사람도 없을까요?”(p.33)     


일본에 김지하 같은 문인이 없다는 한탄은, 2차 세계대전 후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패망의 후유증을 극심하게 겪고 있던 일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인들에 대한 질타다. 소설 안에서 겐자부로의 여동생이, 어린 시절 메이스케 설화를 연극으로 올린 무대에 배우로 섰었던 어머니의 중요 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오빠를 비난하는데, 이것은 전후 일본 문단의 이상한 침묵과 앙가주망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일본 문학계에 대한 비난일 뿐이다.   

   

오빠는 무대에서 들은 이야기를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나요? 기억하고 있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가요? (p.156)     

  

겐자부로가 중요 몇 장면의 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칠고 난폭한 언어를 어린아이인 자신이 듣지 못하도록 할머니가 귀마개를 씌운 탓인데, 이러한 설정은 겐자부로에게 시나리오를 의뢰한 여배우 사쿠라의 상황과 겹친다. 사쿠라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지, 기억하고 있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라는 상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사쿠라는 전쟁고아였는데 우연히 아역배우가 되어 미군이 찍던 <애너벨 리>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나고도 따라다니는 석연찮은 기분 때문에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밤마다 악몽을 꾼다. 뭔가 이상하고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고 대면할 자신도 없어 보인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무의식 속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기억은 나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상태일까.


사쿠라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픈 과거는 안대와 귀마개를 쓴 척 망각해야 할까.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환기하고 대면해야 할까. 문학은 현실에 눈을 감고 과거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위무할까. 아니면 상처, 굴욕, 수치가 있는 과거를 솔직하게 드러내어서 치유 방법을 함께 고민하게 할 책임이 있는 것일까.


겐자부로는 직접적으로 문학의 현실 외면과 침묵을 비판한다. 불안과 두려움의 진원지를 알 수 없어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쿠라에게 ‘봐라, 네가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며 직격탄을 날린다. 봉인되어 있던 <애너벨 리> 무삭제판을 친구 고모리가 그녀에게 보여 준 것이다. 거기에는 어린 소녀였던 사쿠라가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된 미군에게 영화 촬영 도중 훼손에 가까운 성적 유린을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사쿠라는 그녀를 항상 따라다니던 불안과 공포의 실체,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와 대면하고 충격받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긴 치유의 시간을 거쳐 더 단단해진 인간으로 다시 겐자부로 앞에 선다.


사쿠라의 모습을 통해 겐자부로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서 과거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사 해결이 꼭 필요하고, 문학이 바로 이런 기능, 즉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기, 침묵하지 않고 말하기의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앙가주망으로서의 문학이다.  

   

‘앙가제’하는 독자     


『애너벨 리』에서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의미의 ‘앙가제’는, 독자의 앙가제다. 독자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자신만의 해석 공간을 가지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했듯이, 저자의 손을 떠난 문학 텍스트는 자유롭게 개별의 독자와 만난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인간 존재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했지만, 이 말은 문학 텍스트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저자가 의도한 본질, 혹은 본연의 주어진 의미는 텍스트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작품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 책을 들고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는 독자일 뿐이다. 백 명의 독자가 같은 작품을 읽는다면 백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사쿠라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앙가제’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리고, 실존을 실천한 훌륭한 독자다. 겐자부로가 쓰기로 한 일본판 시나리오는 원작 ‘미하엘 콜하스’처럼 민중 봉기의 리더가 주인공이 되는 데 초점이 있었지만, 사쿠라는 이 시나리오에서 진짜 주인공을 발견한다.      

이건 정말 대 수확이에요! ‘메이스케 어머니’는 ‘환생한 메이스케’를 보좌하는 역할로 봉기에 참여한 것이 아닐 거예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봉기의 주동자였어요. 이건 내 영화예요! 그런 방향으로 시나리오 완성에 전력해주셨으면 해요. (p. 83)      


전쟁고아가 되어 미군에게 성적 유린을 당하고, 가스라이팅 속에서 그 미군과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사쿠라는, 남성 히어로보다는 굴욕과 수치 가운데서도 당당했던 메이스케 어머니에게서 ‘되고 싶은’ 자기 모습을 본 것이다.


작품에 적극적으로 ‘앙가제’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재해석을 통해 치유에까지 이르는 사쿠라의 모습에서 작품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본다. 텍스트는 언제나 열려 있다. 무한대로 자유롭게 유동하는 기호들에, 환경, 경험, 과거사가 각기 다른 독자가 자신만의 해석 코드로 접속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시나리오 쓰기에 관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이 시나리오를 끝끝내 완결하지 않고 진화하는 모습으로 두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사쿠라의 앙가제로 인해 주변인이 주인공이 되고 망각했던 넋두리가 복원되어 중심 대사로 자리 잡지만, “내 관심은 사쿠라씨의 재해석에 있어”(p. 92)라는 작가의 말대로, 독자마다 다른 해석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탄생하는 작품만큼 매력적인 실존이 어디 있을까.  

   

나의 앙가제는 곧 인류에 대한 앙가제      


겐자부로가 드러내는 세 번째 앙가제의 의미는 사르트르의『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우리 개개인은 언제나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선택이든, ‘내가 나에게 앙가제하면서 또한 인류 전체에 앙가제하는 그런 선택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태도다. 결혼함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결혼제도에 나 자신을 ‘앙가제’하면서, 종국에는 인류가 결혼제도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데 ‘앙가제’하는 셈이 된다.


사쿠라의 ‘앙가제’는 고통의 과거를 똑바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비극적 사건과 대면하지만, 그것에 발목 잡혀 끔찍한 불면의 밤을 보내는 대신, 설화 속 메이스케 어머니처럼 당당하게 봉기하는 삶을 ‘선택’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정하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자신을 스스로 던지는 삶의 태도, ‘기투’라고 번역되는 사르트르의 ‘프로제’다. 시간은 걸렸지만 사쿠라의 ‘프로제’는 자기 자신에게는 긍정의 ‘앙가제’로, 나아가서는 소설 속 다른 인물들, 특히 겐자부로에게 ‘앙가제’한다.  


일흔 두 살이 된 겐자부로는 스스로 ‘노년의 곤경’이라 부르는 상태에 있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명망 있는 작가로 생의 마지막까지 소설가로 살겠다는 다짐은 변함없지만, 그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는다.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11) 라며 잠정적인 절필을 선언한 상태다.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이렇지만 ‘일흔을 넘기면서 지적 능력의 쇠퇴는…. 나의 경우는 거의 완전 파괴 상태에 가깝지’(18) 라는 말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남들은 영광만 남은 삶이리라 생각하지만, 지력이 쇠락해 감을 느끼는 노작가에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보행 훈련과, 중년의 남자가 되어서도 어린애처럼 걷기 훈련을 해야 하는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다. 보행 훈련 중에 간간이 발생하는 아들의 간질 발작도 그가 대처해야 할 몫이다. 노화와 부양 부담으로 인한 심리적 고립 상태, 겐자부로가 처한 ‘노년의 곤경’이다.


 하지만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극 무대 위 어머니의 넋두리 대사를 온전하게 되살려 노래하는 사쿠라의 모습에서 겐자부로는 새로운 에너지를 느낀다. 그리고 30년 전 중단했던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고통의 과거를 직시하고 존재 본연의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사쿠라의 ‘프로제’는 겐자부로에게 ‘앙가제’할 뿐만 아니라, 그녀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혹은 겪을지도 모를 사람들, 더 나아가서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류 전체에 ‘앙가제’중이다.      


‘What! are you here?’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쉽게 풀어쓰면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 나에게 명령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가 되겠다. 이인화 작가의 소설 제목을 좀 비틀어 설명해 본다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나다’가 되겠고, 더 간단하게는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한다’가 된다. 그리고 누구로 살지 그 선택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다.


이 소설에는『햄릿』의 첫 문장 ‘Who’s there?’를 떠올릴 만큼 강렬한 영어 문장 하나가 등장한다. ‘What! are you here?’ 고모리가 30년 만에 재회한 겐자부로에게 건넨 말이다. 『햄릿』의 첫 문장이 ‘실존’이라는 주제를 무겁게 던져 준다면, T. S. 엘리엇의 시구에서 가져온 ‘What! are you here?’ (뭐야, 자네는 이런 곳에 있었나?)’는 ‘존재의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때론 우리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존재의 상태를 모른다는 말이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르고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던 사쿠라보다는, 모든 걸 알고 나서 누구로 살아야 할지 용기 있게 선택한 사쿠라의 당당함이 더 보기 좋지 않은가.


결국 ‘기억하고 있는데 못하는 척’하는 외면과 회피보다는 ‘뭐야, 내가, 우리가, 이런 곳에 있었나?’라는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더 자유로운 삶으로 이끌어 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패망한 일본, 그 상흔에 갇힌 일본인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 침묵하는 문인들에게 외치는 소리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어제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해서 다른 누군가로 살고 싶은 보통 사람들에게 와 닿는 무게감이 크다.


‘What! am I here?’이라며 잠시 멈춰 서서 나의 존재 상태를 한번 점검해 보자.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프로제’, 그래서 현재의 이웃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앙가제’하는 거대한 일이 이 소박하고 작은 질문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2007), 오에 겐자부로 (박유하 옮김, 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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