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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 May 06. 2024

하이힐은 남성의 신발이다.

루이 14세의 빨간 구두 초상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북관 17세기 객실 1층에는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있다. 작가 미상인 이 작품은 갑옷을 입은 루이 14세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황금색의 화려한 갑옷 보다 눈길을 끄는 건 빨간 타이즈와 화려한 장식이 달린 그의 붉은 구두이다. (베르사유궁에 직접 가 본 건 아니다. 세상이 좋아진 덕에 세계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작품들을 집에서 온라인으로 불 수 있다. thanks 구글)

루이 14세 초상에 그려진 빨간 신발

루이 14세는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프랑스 왕이다. 재위기간이 총 72년을 넘는다. 다섯 살이 채 되기 전 왕위에 올라 14살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재상 마자랭의 섭정을 견뎠다. 마자랭이 사망한 14살을  기점으로 루이 14세는 본격적인 친정에 들어서며 군사개혁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틀어쥔다. 태양의 왕이란 별칭도 가졌던 그는 이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으리으리한 베르사유궁을 건립하기도 했다.


어릴 적 발레를 배웠고(그의 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의 춤'이라는 영화도 있다)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루이 14세는 신발을 사랑한 수제화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일설에는 그가 키가 작아 높은 굽의 신발 하이힐을 신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어쨌든 루이 14세의 신발사랑은 대단해서 프랑스에 제화공이라는 직업을 탄생시켰다고 알려지는데, 수제화를 뜻하는 '오트 펌프스(haute pumps)'라는 용어도 이때부터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오트 펌프스는 원래 뜻대로 보면 상류계층을 의미하는 오트(haute)와 구두굽이 있는 높은 신발 뜻하는 펌프스(pumps)가 결합된 용어이다. 그러니 상류계층이 신는 굽 높은 신발 정도의 뜻인데, 당시 이런 신발은 왕을 비롯한 남성 귀족들만 신을 수 있었으니 고급 수제화를 뜻하는 말로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붉은 굽의 하이힐은 왕과 그가 허용한 사람들만

루이 14세는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굽이 있는 신발을 신지 못하게 금지했다. 특히 붉은 굽의 하이힐은 자신과 자신이 허용한 사람들만 신을 수 있게 했다. 당시 높은 굽의 신발은 남성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더러운 프랑스 거리(비포장이었으니 얼마나 질척거렸겠는가?)를 걸을 때 값비싼 신발이 푹푹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남들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었던 신분의 상징이었고, 특히 붉은 굽의 하이힐은 루이 14세와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왕족 혹은 귀족들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징이었던 셈이다.  

빨간 굽의 하이힐을 신은 루이 14세

베르사유궁 중앙 건물에 전시된 또 다른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더 흥미롭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검을 차고 화려한 왕의 복식을 하고 서 있는 루이 14세의 자세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각선미를 뽐내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한쪽 다리를 앞으로 조금 내밀어 쭉 펴고 있는 자세는 많은 여성들이 사진 찍을 때 다리를 조금이라도 더 길게 나오게 하려고 취하는 포즈와 너무 닮았다. 더구나 이 그림의 루이 14세는 붉은색 굽의 하이힐을 신고 있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리 쪽으로 향한다. 이 그림을 무릎 아래만 잘라서 여준다면 아마도 열의 아홉은 여성의 다리를 그린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 시대 남성 귀족들은 다들 이런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호화로운 생활에 살이 찐 귀족들은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걸었다. 이런 걸음걸이는 프랑스 남성 귀족들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이들을 풍자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귀족들이 이런 굽 높은 신발을 신는 문화는 프랑스가 원조는 아니다. 페르시아 왕족들이 17세기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프랑스로 전해진 것으로 얼려졌는데, 그들 역시 높은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굽 높은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재력과 권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사유궁과 가벨(소금세)

18세기 초반 프랑스는 심각한 파산위기에 몰렸다. 루이 14세의 증손자 격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프랑스 정부의 빚은 30억 리브로. 매년 갚아야 할 돈이 8억 리브로를 넘었다고 알려진다.(풍요와 거품의 역사. 저자 :안재성  인용) 당시 프랑스의 연간 세금이 1억 4천만 리브로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의 재정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이 다. 루이 14세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고 화려한 베르사유궁을 건축하는 등 국가 재정을 탕진한 영향이 쌓인 결과이다.


재정위기의 프랑스는 온갖 종류의 세금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가장 황당하고 가혹한 세금이 가벨(gabelle)이라 불렸던 소금세이다. 매년 무조건 구매해야 하는 일정량의 소금 할당이 이뤄지고 그 소금엔 실제 소금가격의 10배가량의 세금이 붙었다. 짜증 나는 건 귀족이나 종교인 등에겐 이 소금세가 면제 됐다는 사실. 결국 평민들에게 그 부담은 대부분 전가됐다. 더구나 구매한 소금이 남았어도 새로 할당된 소금을 사야 했고(소금세가 줄면 안 되니까) 남은 소금의 사적인 거래도 금지됐다. 염장 등을 위해 소금이 더 필요하면 추가 할당을 신청해 구매해야 하는데, 추가 구매 소금에도 당연히 비싼 세금을 내야 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엔 소금 사용이 많은 염장 제품이 자취를 감췄다.  


프랑스 재정위가와 미시시피 버블 그리고 지폐발행

서민들의 지갑을 털고 또 터는 소금세 같은 세금으로도 프랑스의 재정위기 탈출은 요원했다. 그러던 중 존로(John Law)라는 구세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존로는 이후 프랑스 재무장관까지 지내게 되는데, 미시시피 버블을 일으킨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평가와 현대적 지폐 시스템을 생각해 낸 선구적 금융이론가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미시시피버블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미 대륙의 루이지애나 미시시피강 주변 개발 프로젝트를 놓고 벌어진 사기극을 말하는데, 존로 기획, 프랑스 왕실 협찬으로 만들어진 주식시장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적 버블 사건 중 하나이다.


1718년 1주당 300 리브르였던 미시시피 주식회사 주가는 불과 1년 뒤인 1719년 2만 리브르까지 치솟았지만 1721년엔 50리 리브르로 추락했다. 존로는 주식가격이 한참 좋을 때 주식교환을 통해 미미시피 주식회사의 투자를 프랑스 국채로 받았고, 이후 이 국채를 바탕으로 자신이 세운 제너럴 방크에서 지폐를 발행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왕실의 빚쟁이들(국채 투자자) 미시시피 투자자로 바뀌니 왕실의 빚부담은 크게 줄었고, 나아가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지폐를 찍어내니 발권력이 생겨 시중에 풀린 돈은 경기를 살리는 효과도 다. 하지만 결국 미시시피 버블이 꺼지고 수많은 피해자가 속출하자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더 악화된다. 또 쓸모없는 땅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린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루이지애나는 결국 1803년 미국에 매각되고 만다.


루이까또즈(Louis Quatorze)는 루이 14세

대표적 메스티지 브랜드 중 하나인 루이까또즈는 프랑스어로 루이 14세 다. 프랑스어로 Quatorz가 14이다. 우리로 치면 브랜드명이 '세종대왕' 뭐 이런 셈이다. 가방이나 시계 등에 세종대왕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좀 어색할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그렇다. 1980년 창업자 폴 바랏이 베르사유궁이 있는 베르사유에 그레시옹 드 베르사유(CDV)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루이까또즈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브랜드 로고 역시 베르사유궁의 장미를 L과 Q를 활용해 형상화한 것이다. 재밌는 건 매우 프랑스적인 브랜드의 주인이 한국 회사라는 점이다. 지난 2006년 태진인터내셔널이 루이까또즈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CDV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인수 후 잘 나가던 루이까또즈는 2012년을 정점으로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적자를 보고 있다. 준 명품, 메스티지의 인기가 시들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양극화되며 이른바 어중간한 이미지의 메스티지 보다 명품 또는 가성비를 찾는 소비자가 확실히 양분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림이 감상하고 싶다면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full-length-portrait-of-louis-xiv/TQG6N2S_eAruJQ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louis-xiv-king-of-france-0039/FgGUEl5poz0FlA


*미시시피 버블 이야기는 따로 다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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