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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y 10. 2022

소고기 무우국

    활발하면서도 조용했던 나는, 좋은 기억과 잊히지 않는 기억이 공존하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큰 도로 앞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6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다. 아파트 앞에 매일 찾아와 준 노오란 봉고차를 타고 친구들과 떠들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누가 유치원생 아니랄까 봐 샛노란 유치원복을 입고서는 짧은 다리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숨이 차게 오르다 보면 복도 앞에 문들이 펼쳐져 있었고 각기 다른 동물 그림들이 매달려 어서 오라고 소리쳤다. 그 당시 사슴 반이었던 나는 수호신처럼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슴과 짧은 눈인사를 나눈 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내가 먼저 반갑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와있던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소리치며 반겨주었다. 그 당시 꽤나 유명한 만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그 여자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나에게 친구들은 개사까지 하며 나를 놀려댔다. 어찌나 불러 댔던지 하하 호호 웃으며 같이 부르던 가사는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재미있게 기억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유치원 수업 중 가장 좋아하던 것은 그림 그리기 시간이었다.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를 작은 손으로 꽉 쥐고서는 하얀 종이를 화려하게 채워나갔다. 손이며 팔이며 안 묻은 곳이 없이 더럽혀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 장의 그림을 다 완성해갈 즈음이면 어김없이 12시 종이 울렸다. “얘들아 밥 먹자”라며 크게 소리치던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분주하게 우리들의 식판을 음식으로 채우셨다.


    그렇게 성격 급한 친구들이 먼저 앞다투어 배식을 받으러 나갔고 길게 이어진 줄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을 보다가 “오늘은 소고기 무우국이야. 남기지 말고 먹자.”라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순서가 가까워질수록 어지러운 냄새가 머릿속을 점점 채워나갔다. 차갑게 빛나던 은색 식판에는 빨간 김치와 함께 하얀 쌀밥이 연기를 모락모락 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따라 투명한 국물에는 잘게 썰려진 소고기와 정사각형으로 조각난 무들이 잠겨 있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불쌍한 눈으로 무들을 쳐다보며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원형으로 된 여러 개의 하늘색 책상에 아이들이 둘러앉았다. 밥 먹기 전 인사를 언제 하나 다들 선생님의 입만 바라보았다. 숟가락과 포크를 양손에 쥔 채 ‘오늘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를 외침과 동시에 친구들은 허겁지겁 밥과 반찬들을 입에 욱여넣기 바빴다. 어린 나이라도 취향은 있듯이 밥 따로 국 따로 먹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첫 숟갈을 뜨자마자 맑은 국물에 밥을 다이빙시키는 친구들도 있었다.


    항상 물을 넉넉히 하셨는지 수분을 많이 머금은 쌀은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반찬과 함께 열심히 밥을 먹다가 의심의 눈초리로 국을 멀뚱하니 쳐다보던 나에게 선생님은 얼른 먹으라며 재촉하셨다. 억지로 수저에 1/3을 채운 국물을 쭉 마셨는데 머리가 갑자기 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특히 물에 빠진 무는 가벼운 수저질에도 힘없이 으스러졌다. 으깨진 무들을 모아서 한 숟갈 입에 넣었을 때에는 찐득한 액체 괴물을 입안에 넣은 것 마냥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 둘 깨끗하게 비운 식판을 가지고 선생님께 달려가는 친구들을 보며 심장에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것 마냥 초조해졌다. 축 처진 어깨에 나무늘보 마냥 수저를 들던 나를 발견한 선생님은 어두운 그림자를 몰면서 내게 다가오셨다. 먹기 싫어 죽겠다는 내 표정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버린 남은 밥을 몽땅 국에 말아버렸다. 놀랄 틈도 없이 동산만 하게 한 숟갈 크게 뜨시고는 반찬도 없이 내 입에 집어넣으셨고 냄새라도 감추고자 숨도 안 쉬고 꿀꺽 삼켜버렸다.


    마저 빨리 먹으라는 말을 툭 남기고서 선생님은 서둘러 정리를 하러 가셨다. 갑자기 툭 홀로 남은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가버린 그녀의 뒷모습만 보라 보았다. 그녀는 무섭고도 어려운 존재였고 먹기 싫다는 말을 꺼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 너무 선명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에게 다시 돌아온 그녀는 한 숨을 크게 쉬더니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미닫이 문 너머의 좁고 어둡게 펼쳐진 곳에 긴 싱크대가 보였다. 먹다 남긴 밥과 함께 나를 그곳에 던져 놓고는 다 먹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작은 식탁과 차갑게 말라버린 밥을 다시 맞이했다. 투명한 국물을 전부 마셔버린 쌀알들은 퉁퉁 부풀어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길쭉한 형광등과 싱크대에 수도꼭지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서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빨리 상쾌한 빛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수저 끝부분에 밥알 몇 알씩 긁어모아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고 쉬기를 반복하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에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 국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 보글보글 끓는 육수로 가득 찬 냄비만 봐도 군침이 돈다. 정사각형으로 썰린 무, 소고기 조금, 다진 마늘과 파를 종종 썰어 넣으면 한 그릇 뚝딱. 소고기 뭇국을 끓일 때마다 생각나는 어지러웠던 그때의 추억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아닌 채 자리 잡았다.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그 당시 그녀는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고된 직업에 지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잘 먹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 맡았던 그 냄새는 아직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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