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을까 말까 하다 받았는데...
저녁식사를 한참 준비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후배 A의 전화. 평소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A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뜨자 순간 고민이 된다. 이 전화, 받아야 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통화버튼을 누른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A의 목소리 "언니, 잘 지내요?" 간단한 안부를 서로 주고받은 후에 지금은 저녁식사 준비 중이니 식사 후에 내가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족들과 밥을 먹는 동안 A가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문득 1년 전 나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어린이집 교사를 그만두고 개인자산관리사 일을 시작했다는 A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자 내가 본능적으로 A의 전화를 곧장 받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을 다 먹은 뒤 약속대로 A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아니면 일단 아이들을 핑계로 연락을 미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역시 A였다. 내 전화가 늦어지는 것 같자 다시 전화를 한 A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일단 전화를 받았다. 빨리 다시 전화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A에게 이런저런 근황을 물어보았다. A는 나에게 지난해 연락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개인자산관리사로 일을 하고 있으며 회사 가까운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다 했다. 그리고 A는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라는 나의 말에 자신이 나를 만나러 와도 되겠냐고 묻는다. A가 직접 내가 사는 동네 근처까지 오겠다고 하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가 둘째를 남편에게 잠시 맡길 수 있는 시간을 떠올려보고 그 시간에 오는 게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A는 흔쾌히 그 시간에 맞춰 올 수 있다고 한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런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A를 만나더라도 엉뚱한 금융상품이나 보험에 가입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했다. 오랜만에 먼저 연락이 와서 만나고 싶다고 하는 후배에게 커피나 한잔 사주고 들어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었다.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고 A를 만나기로 한 집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A는 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후 처음 보는 A의 얼굴에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A와 함께 카운터에 서서 QR체크를 하고 메뉴를 주문하는 사이 점원이 매장 이용이 1시간으로 제한되는데 괜찮은지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속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1시간 정도라면 A와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빠듯한 시간이고 그 대화 사이에 내가 곤란해질 만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난 몇 년간 각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A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았다. 지인 중에 개인자산관리사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자신도 고객으로 있다가 점점 자산관리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어린이집 교사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주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산관리 분야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던데 대단하다며 A를 칭찬했다. A는 수줍게 웃으며 아직 많이 배우는 중이고 고객도 더 많이 늘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A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 하고 말았다. "사실 저는 이 분야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무엇보다 저를 통해서 고객들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잘 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많이 느껴요. 그런데 제가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면 제가 무조건 자기들에게 보험 가입시키려는 줄 알고 연락을 안 받거나 아예 무시할 때가 많더라고요. 그럴 때는 저도 사람이다 보니 상처를 좀 받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자 A의 연락을 받고 직접 만나러 나오기까지 했지만 그녀의 고객은 절대 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철저하게 방어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 나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A가 나에게 전화를 걸기 전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했을지,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왔을지 나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옛정을 생각해서 그녀가 무안하지 않을 정도로만 만남에 응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온 나의 오만함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1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는 동안 A는 자신이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한 번 보여주긴 했지만 그 어떤 상품도 가입을 권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명함을 청해 건네 받았다. 그리고 내가 복직하면 회사 근처에서 밥 한 끼 하자 하고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하고자 할 때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것과 일단 들어는 주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에 동조되거나 넘어가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나는 그동안 후자의 편에 서서 욕을 덜 먹는 쪽을 선택해왔다. 만약 상대의 제안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나에게 이득이 되고 타당한 제안이라면 응하면 될 것이고 아니라면 정중하게 거절하면 된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나는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적용되었기에 선입견 없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이미 그럴듯한 거절의 대답을 머릿속에 정리해놓고 적당한 거절의 타이밍을 찾았던 적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단지 처음부터 거절하지 않았을 뿐, 그래서 상대방에게 조금 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떠한 이해관계없이 순수하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이미 알고 지내온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나에게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이나 도움을 주느냐 그렇지 않냐에 따라 정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나 쓰이던 호혜주의란 말이 인간관계에도 더 빈틈없이 적용되는 듯하다. 만약 후배 A가 지금처럼 고객 유치가 중요한 개인자산관리사가 아니라 어린이집 교사로 계속 일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육아휴직 중인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찾아와 주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하든 A는 거절의 무안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나에게 연락을 했고 결국 우리는 만났다. 짧은 그녀와의 만남 속에서 나는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 여러 감정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잘했다"이다. 그녀와의 만남 덕분에 얄팍한 친절로 위장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려 하는 내 욕심과 마주할 수 있었고 사람에 대한 진솔한 마음과 태도란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네 인생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주고 받지 않더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그저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다독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다음에 또 누군가 오랜만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면 그땐 망설이지 않고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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