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졸이며 준비하고 기다렸던 수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검사였던 MRI Biopsy를 너무 고생스럽게 받았던 나는, 고민 끝에 수술 전날과 이후 2-3일을,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교회언니네 가서 있기로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정확히 암 수술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수술을 해야 해서 E형아네 가서 며칠 있다 올 거라고만 말을 했다. 눈치 빠른 큰 아이는 며칠 상간에 전화로, 문자로 엄마 괜찮냐 물어왔고, 막둥이는 다음 주말에 있는 자기 연극 공연에 올 수 있냐고 해맑은 질문을 보내왔다.
매일 가야 하는 방사선 치료가 시작될 즈음엔, 모두 방학이라 집에 와있어 딱히 둘러댈 말도 없고, 학기도 끝난 이후이니 그때 얘길 해야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후에 아이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눈치 빠른 큰애는 물론, 천방지축 사춘기의 정점을 찍는 둘째조차도 엄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이미 다 알고 있었었다. 다만, 각자의 성향에 따라 큰애는 혼자 속상해하며 괴로운 마음을 삭이고 있었던 것뿐이었고, 막내는 뭐든 길게 생각하지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금세 떨쳐버리는 성품이다 보니, 그때그때 엄마생각이 날 때에만 “엄마, I love you" 하고 한 줄씩 문자를 보내며 나름의 응원을 해준 셈이다.
처음 진단을 받고 가족들, 서울의 어른들, 주변의 친구들, 일하고 있는 학교에 어떻게 알리고 얘길 꺼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며 다시 경험자인 몇 사람에게 물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나누기에 무리없는 정도로만,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사실만 간단명료하게 나누면 된다 였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가슴 아파하며 기도로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과, 호들갑스럽게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며 동시에 나의 얘기를 주변에 널리 널리 알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비록 후자의 경우라 해도 그런 사람들은 그다지 나의 진단과 투병에 대해 생각보다 오래 기억하지도, 애틋해하지도 않고 금세 잊을 거라며,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내 컨디션 조절에만 집중하라는 말도 해주셨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대답 중 하나는, "걱정하시는 막내 고등학생 아들은, 가장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세요, 걔네들 지금 인생 최고로 어수선하고 난리 바가지인 사춘기 정점을 찍고 있는 시기라, 엄마의 암 진단이 그다지 오랜 시간, 엄청난 일로 안 느껴질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오히려 엄마에겐 도움이 되는 셈이니, 너무 애틋해하지 마시고 수술 전 컨디션 조절 잘하세요, 빨리 회복하셔야 다시 또 그 막내하고 전투를 하시죠~"
역시나 동병상련, 혼란스럽고 시시각각 감정이 요동치는 그때에, 지인이 보내온 쪽지에 혼자 한참을 웃고, 기운을 차려 집안 정리를 하고 병원으로 들고 갈 서류들 확인, 간단한 짐가방을 싸기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들은 자세히 알리지도,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였고, 문제는 한국에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였다. 엄마가 18년 전 급작스런 폐암 진단으로 1년 반을 채 못 버티고 돌아가신 이후, 줄곧 혼자 지내시는 우리 아버지는, 세상 당신이 가장 잘한 일이라곤 맏딸 번듯이 키운 거 그것뿐이라 믿고 계시는, 생각할 때마다 항상 염치없고 죄송스럽고 나를 할 말 없게 만드시는 분이다. 내가 감기 걸려 목소리만 좀 달라져도 한참을 붙잡고 건강관리해 얀다며 걱정이 태산이신 양반에게, 아버지의 그 겉만 번듯해 보이는 한없이 부실하고 무심하고 멀리 있어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염치없는 딸이, 암이라 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라는 말까지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당장 들어와라 난리이실 것이고, 한국에 가서 수술과 치료의 과정 동안 옆에서 가슴 아파하시며 괴로우실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니 얘길 하는 건 고사하고,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친정아버지에겐 수술도, 그 이후의 방사선 치료도 말씀드리지 않았고, 마음 약해서 비밀을 지키지 못할 남동생 에게도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얘길 하고 기도 부탁을 하고 피붙이의 절절한 걱정과 위로와 챙김이라도 받았으면, 수술 전 그 기다림의 시간이 조금은 덜 두려웠을까 하는 후회가 살짝 남아있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투병의 과정은 오롯이 나 혼자의 몫이고, 그런 괴로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텨낼 자신이 없다면, 조용히 혼자 감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록 한국에 떨어져 있는 가족의 위로와 응원은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정말로 귀한 친구들을 옆에 붙여주셨고, 친부모, 형제만큼이나 애틋해하고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는 귀한 분들의 돌봄과 간절한 기도 덕에 나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며 이제 코앞으로 닥쳐온 수술 준비를 하나씩 해나갈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으로 잡힌 정확한 수술시간, 그리고 수술 전 내가 챙겨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전화를 금요일 오후에 받았다. 수술은 새벽 6시에 병원 수술센터로 들어가서 준비를 하고 8시 무렵 시작하여 경우에 따라 1-2시간 정도가 걸리고, 회복실에서 1시간 정도 경과를 본 이후에 퇴원이라고 했다.
한국은 수술 전날 입원을 하고 그에 따른 수술 전 검사들을 모두 하고, 처치를 하고 그리고 수술을 받고 하루 이틀 경과를 보다가 퇴원인데 반해서, 여기선 수술 전에 각각 해당과 와 필요한 검사들을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마쳐야 했고, 수술 전 처치도 직접 해야 할 것들이 좀 있었고, 내 경우 아주 복잡한(?) 케이스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미국 의료시스템, 보험과 관련된 사항인지, 당일 새벽 들어가 수술을 하고 oupatient로 분류가 되어 한두 시간 회복실에서 경과를 지켜본 이후 점심시간 무렵 보호자가 있는지 확인을 한 후에 퇴원을 시켜주는 시스템이었다.
원래는 수술 당일 나를 픽업해 같이 가주기로 얘기가 되어있었는데, 수술 전날 혼자 있지 말고 와서 자고 같이 병원에 가자는 왕언니의 연락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안 그래도 수술 전날 과연 혼자서 잠이 오려나, 약을 먹고 자려니 혹시나 시간에 맞춰 못 일어날까 걱정이 되던 차에, 따뜻한 왕언니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바로 옆에 사는 또 다른 언니가 시간 맞춰 데리러 와 주었고, 언니와 수다를 떨면서 도착한 왕언니네엔 따뜻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친정에 왔으니 맘 편히 있으라는 그 말 한마디에 와락 눈물이 쏟아지려 해서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늘 그렇듯 왕언니 내외분과 따뜻한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내일 아침 보자는 인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서울의 남편, 친구들 에게서 온 폭탄문자들, 보스의 영상카드가 담긴 이멜 을 확인하고 아이들에게, 엄마 내일 아침 수술이야 기도해줘~라고 짧게 문자를 보낸 후 잠을 청했다.
병원에 도착해야하는 시간은 새벽 6:30, 늦어도 한 시간 전에는 여유 있게 출발을 해야 했다. 간밤에 푹 자기도 했고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다시 챙기고 성경 읽기와 QT 묵상을 하려고 잠시 앉았는데, 청명하고 깨끗한 하늘과 눈부신 아침햇살이 창 너머로 보였다. 사는 게 바빠서 가을하늘이 이렇게나 드높고, 아침햇살이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줄도 모르고 지나쳤구나, 이런 소소한 나의 일상이 기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나를 가만 두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는 타고난 천성덕에, “하나님, 아시잖아요, 저 더 잘할 수 있어요, 제가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저를 붙잡아주세요,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아요"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내가 두 손에 꽉 잡고 있던 모든 것들, 내 안의 욕심들, 간절한 소망들... 급작스런 암 진단을 받고 졸지에 유방암 1기 환자가 되어버린 이후에 바라보니, 그것들은 정말 한낱 부질없는 어리석은 욕심이고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미련한 인간의 교만함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1기 유방암은, 다른 환우들이 들으면 그걸로 걱정을 하냐고 타박을 할 정도로, 예후도 좋고 수술도 치료법도 많이 어렵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5년 생존율이 90퍼센트 이상이며, 재발이나 전이에 대한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그러나, 내 나이에, 나 정도의 건강상태에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그닥 높지않다는데도, 난 그 낮은 확률과 경우에 해당되고 말았으며, 남들이 말하는 낮고 낮은 확률이 나에겐 100퍼센트로 맞아떨어지고 보니,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애써 평온한 마음을 가져보려 해도 '수술이 잘 못 되어서 다시 해야 하면 어쩌지? 수술 후 치료가 너무 힘들면 어쩌지? 다 마치고 나서 이게 재발을 하면 어쩌지? 혹시나 검사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정말 수많은 "만약에~"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돌아가기 시작하면, 먹지도 잠을 이룰 수도 없었고, 그 불안함은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끝난 지금도 불쑥불쑥 나를 괴롭히는 감정들이기도 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약한 내 주변엔, 감사하게도 절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나보다 더 간절히, 내 모든 수술과 치료와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고, 나는 그 힘으로 많이 흔들리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있음을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병원의 수술센터는, 이 지역 코비드 상황이 잠시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입구에서 신분증과 모든 서류들을 몇번에 걸쳐 확인을 해야 했고, 같이 가준 왕언니 역시 신분증과 모든 확인을 하고도, 나는 3층의 수술실로, 언니는 또다른 층의 대기실로 가야 했다.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전화로 언니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 수술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해서, 다시금 수술 전 검사를 받기 위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그 이후부터는 휠체어에 앉아 팔에 채워준 내 정보를 가는 곳마다 보여주고 확인을 받으며 검사를 했다.
설마 일주일 사이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지막 mammogram을 받았다. “Everything looks okay, good luck!"이라고 어깨를 살짝 잡아주고 가는 영상의학과 의사 선생님을 뒤로하고, 드디어 내 수술을 담당하는 유방외과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다시 한번 꼼꼼히 수술 과정과 기타 등등 설명을 듣고, "자, 이제 가볼까?" 하면서 나를 수술실 앞으로 안내해주는 간호사, 의사 선생님과 들어선 수술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밝고 환하게, 10월의 아침햇살이 내가 누울 수술대 위까지 밀려들어오고 있었고, 나를 위한 건지 의료진들을 위한 건지, 여하 간에 즐겁고 명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술을 집도하는 선생님, 마취과 선생님,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들 두 명, 모두가 각자의 이름을 소개하며 내 바이탈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앞에 환자는 혈압이 높아서 우리가 좀 고생했는데, 넌 아주 좋네~” 라며 밝은 음성으로 이제 마취약이 들어갈 거라면서 따뜻한 담요를 위에 덮어주고, 양팔을 고정시켜 주었다. "나 지금 자세가 꼭 예수님 같아" 하는 내 말에 모두가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고, 팔에 따끔하며 뭔가 느껴져서 살짝 움찔하니 "괜찮아~" 하며 내 팔을 살살 쓰다듬어주는 집도의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몇 주의 괴롭고 불안하고 힘들었던 기다림의 시간을 뒤로하고, 드디어 나의 유방암 수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