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제

14

by ZAMBY



우리의 전화번호가 된 9월 29일 이후,

너는 매일같이 내 근처를 서성였다,


학교 후문 담벼락에 기댄 네 실루엣이 보이면

옆에 나이 어린 같은 과 친구들이 환호했다.

내 걸음은 온통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네 곧은 시선에 가 닿았다.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끼고

별이 저무는 하숙집 앞 돌계단에 앉아 입을 맞추었다.

슬픈 노랫말이 귓가에 흘렀다.


네 시선은 깊고 황홀하여

앞에 선 자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했다.

작은 일상 이야기마저 귀하게 들어주는 네 표정이

마치 내가 훌륭한 이야기꾼인 듯 착각하게 했다.

너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여백 안에서 내가 특별하다고 해석했다.

그것은 말로 열거하여 알게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한 편의 영화처럼 아름다운 장면들로 채워졌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너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그래?”

“무슨 말이야?”

“응. 가끔 네가 날 쳐다볼 때 몸에 구멍이 날 거 같아.”

너는 웃는다.

“그럴 땐 구멍이 아니라 녹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아.”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 볼 때는 노려보는거구. 널 볼 때는 다른 거야.”

“그게 어떻게 다른 거야?”

“몰라. 그런 건 말로 표현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느끼는 거지.”


너는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나를 강하게 묶었다.

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 갈망이 너무나 커 스스로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디 즈음에선가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첫 연애 때 하던 방식으로 시험을 출제하기 시작했다.

네가 복학을 하고 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던 네가 학교에 다니느라 보이지 않게 된 봄부터,

나는 조금씩 너를 시험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너는 다시 걸지 않았다.

내가 다른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어도 너는 화내지 않았다.

너는 시험마다 낙제했다.

출제자의 의도가 무색하게.

난이도 높은 문제를 내밀 때마다 답안 쓰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해 여름 어디즈음에서 네가 낙제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너의 생일을 보름 앞두고.


너의 생일날.

너에게 주려던 모자를 가지고 집 앞에 갔다.

너는 모자를 쓰고는 별말이 없었다.

네 표정은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떤 말을 했는지, 뒤를 돌아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로 이별했다. 울지는 않았다.

네가 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거야.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모자를 가지고 가지 말걸.


자존심을 버리지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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