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덥다. 열대야다.
벌써 며칠째 밤낮 없이 30도를 넘는 찜통이다.
거실에 놓인 에어컨이 집 전체를 식히고 있다.
방문을 열어둔채로 끈적한 바닥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 생일 축하한다. -
지울까.
삭제 버튼을 누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가능하다.
내 번호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번호인 것으로 위장이 가능하다.
넓은 서울 하늘 아래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지극히 낮으니까.
나도 너처럼 숨을 수 있다.
갑자기 머리가 뜨거워져 벌떡 일어나 앉는다.
너는 내가 며칠째 답이 없어도 왜 초조해 않는 거지.
내 전화번호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는 걸 너는 어떻게 확신하지.
우리가 영원할 줄 알았던 겨울에 만든 번호.
같은 뒷자리 번호를 공유하는 게 유행이라 우리도 따랐던 것일 텐데
나는 한 번도 그 번호를 바꾸지 못했다.
우리는 관계의 시작을 전화번호와 함께 정의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말 분위기가 대학로 앞을 활기차게 휘감았다.
사거리 횡단보도 모퉁이마다 휴대전화 가게들이 자리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하자. 다들 그렇게 한 대.”
멀뚱하게 선 너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너 어리버리하던 그날?”
너는 웃었다.
나는 눈을 흘기지만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네가 사랑스러워
그 날짜를 종이에 단단하게 적었다.
1213
“고객님 이 번호는 이미 누가 사용하고 있네요.”
네가 재빨리 새로운 번호를 건넸다.
“0929”
그렇게 우리 번호는 하나가 되었다.
“근데 그건 무슨 날짜야?”
새 휴대전화 상자가 든 종이가방을 들고나오며 너에게 물었다.
“내가 전화한 날.”
너는 새로운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무심히 답했다.
“전화한 날? 바다에서?”
나는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너에게 농담을 던졌다.
“뭐야. 전화할 때 날짜 봐가면서 하는 거야? 너 다이어리 쓰는구나?”
기분이 좋아져서 네 오리털 점퍼 주머니에 손을 쏙 넣었다.
너의 길고 마른 손이 작은 주머니 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날이 우리 1일이야”
너는 뿌듯한 듯 웃으며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 다정함이 스며들었다.
“아 그날이 1일이구나.”
구슬을 굴리듯 되뇌었다.
그 겨울 거리에는 김동률의 노래가 온통 흘러나왔고
너는 길 위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눈발이 날렸다.
그 후로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번호를 바꾸지는 않았다.
01*****0929
나를 더 무력하게 한 것은 네 번호 뒷자리다.
너의 결백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네 번호는 여전히 그날에 멈추어있다.
강남역 5번 출구.
나를 보며 걸어오던 네 모습이
바뀌지 않은 전화번호처럼 엉겨 붙는다.
자잘한 장면들이 네 걸음 하나마다 내 앞에 펼쳐친다.
너는 흐르지 않고, 지나지 않고,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세월을 관통하듯 나를 보았다.
그때 나는 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나도 시원하게 한마디 할 걸 그랬지.
이혼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