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이별

11

by ZAMBY



겨울이 거의 끝나가던 2월이었다.

세기 말의 허무와 새천년의 흥분이 뒤엉킨 거리에

현란한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내가 일하던 가게도

프랜차이즈 햄버거 브랜드로 전환하면서 어수선했다.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방학을 마치면 개강이라 나는 어차피 일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그저 개강하기 전에 네 마음을 알고 싶었다.

우리는 학교도 다르고 집도 멀었다.

근무시간이 달라 며칠째 만나지 못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본 적이 없었다.

너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받기만 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네가 만든 체스판 위에 선 나는 수를 먼저 읽는 법이 없었다.

판 위에서 엉거주춤 망설이다

네 말이 깊숙이 들어오면

그제야 분주히 말을 움직였다.

한 치 앞도 모른 채.

그리고 어느 순간, 니가 퀸으로 변신하면 나는 의미 없이 무너졌다.


네 번호는 사라졌다.

너는 마치 가상현실에 존재했던 캐릭터처럼 흩어졌다.

유일하게 현실에 남아 있는 네 친구의 번호를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겨울 방학이 끝났다.

새 학기를 맞은 학교는 푸르게 빛났다.


갑자기 사라진 너에게 나는 왜 아무런 원망도 없었을까.

별다른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냥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가르쳐주고. 일을 배우고.

가끔 농담을 주고받은 사이였으니까.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함께 소주를 마셨던 것 말고는

별다른 추억도 없었던 우리라서.


그래도 우리는 같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들으며.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라서.

문득문득 너를 생각했다.


함께 듣던 라디오에서는 새로운 DJ가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함께 듣던 015B의 노래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이 노래 좋지 “ 같은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굵고 낮은 음성의 진행자는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주며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진리를 읊조렸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유행도. 취향도. 사랑 혹은 믿음 같은 것들도 결국에는 변하거든요. “


그날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조정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났던 햄버거 가게는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변신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예비역 선배와 영화를 보기도 했다.

늦은 입학을 만회하고자 여름방학에도 수업을 들었다.

IT기업에 들어가 회사 주식으로 부자가 된 선배들이

학교로 와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었다.

몇 년 전과 다르게 모두가 돈을 쓰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교수님들은 학생이 모자를 쓰고 수업에 참석하는 것을 참지 못했고,

20년 전에도 있었다는 막걸릿집 앞은 여전히 신입생들이 속을 게워낸 자국이 남아있었다.

휴대전화를 누구나 사용하게 되었지만 전화요금이 부담스러워

여전히 공중전화 부스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지만 속도는 생각보다 더뎠다.

봄과 여름이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가을.

새로운 판을 들고 네가 나타났다.


그때도 나는,

네가 만든 새 판 위에

내 가장 찬란한 시절이 놓일 줄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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