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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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그해 겨울,

수능시험을 치르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학교에 나보다 성적이 좋지 못했던 아이들이

내 주변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대학 원서를 내보일 때 굴욕감을 느꼈다.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으로 갔다.


첫 대학생활은 그럭저럭 즐거웠다.

무거운 전공서적을 가슴에 안고 출근 인파와 함께 버스에 올라탈 때,

이제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이 흐리면 출석 체크만 하고 몰래 강의실을 나와 막걸리를 마시고,

학교 벽에 붙은 대자보 앞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봄꽃이 지고 캠퍼스가 초록으로 반짝일 때

나보다 예쁜 글씨로 손 편지를 쓰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휴대전화기가 없었다.

나의 연애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용건을 녹음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공백이 있는 상태의 소통을 했다.

당시의 연애는 온통 기다림과 모호함으로 채워졌고,

그 시간과 시간, 질문과 대답 사이의 공간에서

끝없이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시를 적은 편지로 내 마음을 산 그는

훤칠한 키에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제법 인기가 많았다.


내가 첫사랑은 아닐 것 같은, 이미 두어 번은 연애를 해봤음직한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반듯하고 동그란 그의 손글씨를 사랑했다.

그가 나의 삐삐에 녹음해 준 동물원의 노래에 마음이 설렜고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칠 때 건네는 손 편지에 가슴이 두근댔다.


그 공백을 사랑했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여백.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보드라운 긴장의 감촉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류의 평화롭고 찬란한 감정은 대개 유효기간이 짧았다.


그는 뭐든 나보다 많이 알고,

어디를 가던 다 나와 가기 전에 먼저 가본 곳이었다.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우리가 영화관에 가거나. 학교 앞 만화가게에 앉아있으면

나보다 여성스럽고 세련된 언니들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약간 촌스러운 내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경험 많은 노련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들면

어이 없게도 상대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노련해지는 대신 잔혹해졌다.

집에 있으면서도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남자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셨다.

그가 화를 내면 그 순간을 은근히 즐겼다.

그러면 사과를 하고 우리는 다시 살가운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1년여를 아슬아슬 외줄을 타며 연애했다.


그리고 그만한 연인들이 그렇듯 결혼을 약속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결혼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랑에 대해서도.

좋은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욱 알지 못했다.


관계가 조금 익숙해졌다 싶을 때

급작스럽게 잘 다니던 학교를 바꾸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해 여름,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가 입대한 지 4개월이 지난 여름이었다.


군에서 오는 빼곡한 수양록 일기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나의 공감력은 수양록의 두께만큼 얇아졌다.

어설픈 감정을 영글게 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는 서툴렀다.


첫 연애는 성근 감정의 밀도를 낯선 설렘의 경험으로 덮는 조악한 회화 같았다.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나는 결국 연애 말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사랑이 아닌 성취로, 내가 가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없는 독서실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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