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름 - 결혼
자신감에 대한 기억은 늘 짧다.
한껏 부풀다가 어느덧 바람이 빠진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작은 계기였던 것 같다.
냉소, 라든가. 지나가는 한마디. 혹은 나보다 더 나아 보이는 인생을 볼 때
겨우 주입해 둔 가스가 어디로 새어나가는지 모르게
그저 내 안에 나는 작고 볼품 없어지곤 했다.
제법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쉽게 바람이 빠지는 싸구려 풍선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늘 빵빵한 상태를 유지하려 부단히 애썼던 거 같다.
바람이 빠지면 다시 불어넣고
새어나간다 싶으면 다시 얼굴이 발개지도록 새 입김을 불어넣었다.
풍선을 바꾼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빠지는 바람의 속도만큼 새로 불어넣느라 늘 분주했다.
혜정이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물론 우리도 반대했다.
나는 특히 말렸다.
나는 혜정의 남편이 명문대를 나온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학벌의 위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의 남편은 꽃미남이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나는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예뻤다는 걸 기억한다. 기다란 속눈썹. 하얀 피부. 핑크색 입술. 가늘고 작은 코. 호리한 몸. 뒷자리에서 조용히 학교생활을 했지만 그 녀석은 단연 돋보였다. 그 미모로 내 친구 혜정의 마음을 잡았다. 혜정이는 광대와 턱이 발달한 얼굴형에 외커플의 큰 눈을 가진 다소 고집스런 외모로,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과묵하며 똑똑했다
대학 때 그녀가 사는 월세집에 들렀다.
한창 길에서 신용카드를 신원확인도 안한채 뿌리던 시절이다. 신용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그녀의 방은 창문이 없는 중간방이었다.
말 그대로 중간에 끼인 방.
하나의 방을 가벽으로 3등분을 하고
집주인은 각각의 방에서 월세를 받는다.
내 친구는 가장 저렴한 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맘때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그녀는 주 10회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창문 없는 방에서 우리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고3 때 담임 이야기를 하다가 킥킥 웃었다.
늘 입에 욕을 달고 살던 체육교사였던 아저씨.
그 아저씨만 아니었어도 우리 대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않았을까.
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잠이 들었다.
혜정이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3명의 자녀를 다 키운 후에. 외할머니네 집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혜정이는 그래서 아버지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산다.
그런 혜정이가 아버지가 반대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음을.
용서할 수 없음을.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아들을 원망하고 있다고.
미워한다고.
돌이킬 수 없다고.
그녀는 울지 않는다.
원래도 그랬다.
외할머니에게 가버린 엄마가 안부조차 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언니와 다툰 후에도
엄마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에서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그 방에서 자신이 길에서 받은 신용카드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녀는 결코 운 적이 없다.
매번 눈물은 내 몫이었다.
오늘도 다들 그녀를 둘러싸고 운다
에이 이게 뭐야. 왜 이런 거야.
사랑한다며. 사랑해서 결혼했자너.
뭐야 너.
왜 이런 거야.
흐르륵.흐륵.
다들 취했다.
내 생일인데. 이제 관심도 없다.
뭐 곧 12시네.
에라. 뭐 이러냐.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혼하면 안 되는 거야?
반대하는 결혼은 결코 불행한 거야?
기혼녀 한 명과 노처녀 둘. 이혼녀 하나.
우리의 결론은 명확하다.
결혼은 현실이야.
현실이 뭐냐고?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번 돈을 쓴다. 그리고 그걸 다 함께 한다.
그것 자체도 충분히 놀라운데.
거기다가 새로운 문명이 충돌하는 거.
소우주 두 개가 뽝. 충돌하는 거야.
그럼 뭐 알겠지?
하나가 되거나. 아무것도 남지 않거나.
그런 거야.
아무것도 안 남는 거.
그게 결혼이라고.
꼬치에 꽂힌 은행알을 씹으며
은정이는 큰소리로 결혼이 無를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