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의 탄생과 진화 ②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명료하고 깨끗한 음향이었다. 왜냐하면 매우 빠르고 섬세하게 진행되는 음악과 노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모차르트나 로시니의 아리아에서 이러한 특징은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가능한 한 무대에 가깝게 객석을 배치하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1791년 비엔나에서 <마술피리(Magic Flute)>를 공연한 이후에 아내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은 오케스트라와 가까운 박스에서 (연주를) 들었을 때
음악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를 거예요.
이것은 먼 갤러리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오페라극장의 명료한 음향은 실내에 흡음재가 많아지면 더욱 좋아진다. 특히 한껏 치장한 관객들이 아래층 좌석과 박스를 가득 메워서 전 객석이 만석으로 차 있을 때 더욱 향상된다. 관객이 많을 때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감흥이 고조되고 더 큰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음악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운집해 관람할 때 잔향시간이 짧아지게 돼 음악적 디테일과 음성 명료도를 낮추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당시의 극장의 천정은 평평했는데, 돔이나 볼트 천장처럼 오목한 표면에 의해 발생하는 잠재적인 에코를 방지할 수 있었다.
마감재 역시 매우 중요하다. 오페라극장에서 고음부가 반사되는 동안에 저음부는 흡수되면 사람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더욱 깨끗하게 들린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중음 이상의 주파수 대역이기 때문이다. 오페라극장에서 마감재로 주로 사용되는 얇은 판재는 저음부는 흡수하고 중고음은 반사하므로 이러한 효과를 내는데 적격인 소재이다.
18세기 오케스트라 악기의 음량은 이후의 악기에 비해 작았다. 점점 커지는 오페라극장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오케스트라 음악의 밸런스였다. 충분한 규모의 블렌딩된 소리를 내는 음악당 오케스트라와는 달리 오페라극장에서는 제한된 소규모 악단으로 명쾌하고 깨끗한 소리를 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케스트라를 관객들이 볼 수 있게 드러냄으로써 오케스트라 소리가 반사음보다 직접 관객에게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이탈리아식 오페라극장에서 오케스트라가 객석의 맨 앞에 위치하는 이유이다. 때때로 오페라와 극장의 규모에 맞추어 오케스트라 연주자의 수를 조정하기도 했고, 드레스덴 오페라극장(Staatsoper Dresden)은 오케스트라의 관악기 연주자 뒤에 커튼을 쳐서 음량을 조절하기도 했다.
18세기 오페라극장에서는 종종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확성하기 위한 장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1740년 개관한 토리노의 파르마 레죠 극장(Teatro Regio)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 전체 길이에 해당되는 반 원통형의 여물통을 조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여물통의 끝을 관으로 무대까지 연결했는데, 여물통의 재료와 형태에 의해 소리가 공명하고 반사돼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확성되도록 의도했다. 그리고 바닥 아래의 공기층에 의해 나무 바닥이 공진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에서 자주 사용됐으며, 때로는 이 음향 통이 그릴로 마감돼 노출되기도 하고 관객석까지 연장되기도 했다.
오페라 가수의 소리는 무대 주위의 커튼과 장치물에 의해 흡음되기 때문에 흔히 무대 밖으로 나가기 전에 급속하게 감쇠한다. 전무대(forestage)가 없는 극장에서는 가수의 소리를 반사할 바닥면이 없기 때문에 종종 무대 바닥 아래부터 객석 열 바닥 아래까지 벽돌로 공간을 만든 후에 일종의 수로를 만들어 물을 채웠다. 수로 끝에는 그릴을 달아 소리가 물을 통해 객석 끝까지 전달되게 만들었다.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여겨졌다.
첫 오페라가 공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페라를 보러 가는 것은 대중의 습관이 됐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영화관에 가는 것과 비슷하게 오페라는 대중의 인기와 사랑을 받으면서 날로 성장했다. 오페라의 연이은 흥행과 늘어나는 수요로 인해 오페라 극장의 규모도 점차 커져갔다. 1937년 나폴리에서 개관한 산 카를로 극장(Teatro San Carlo)은 당시에 가장 큰 오페라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전형적인 말발굽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1층 객석 외에 6개 층에 총 184개의 박스로 이루어졌다. 외관은 전형적인 이오니아식 기둥과 열주로 구성돼 신고전주의적인 정면을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의 정점은 역시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이다. 밀라노는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18세기 당시 유럽의 문화와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당시 밀라노에 있었던 레지오 두칼레 극장(Teatro Regio Ducale)이 1776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여왕의 윤허를 받고 건축가 삐에르마리니(Giuseppe piermarini, 1734-1808)가 설계해 1778년 개관했다. 이전의 극장에서는 모차르트가 여러 차례 오페라를 공연했다.
스칼라 극장은 당시까지 가장 규모가 크고 훌륭한 극장이었다. 거의 완벽한 말발굽 모양의 둥근 형태에 2,800석 규모의 객석을 수용했고, 총 7층의 갤러리에 260개의 박스가 배열돼 있다. 건립 당시 각 박스는 기부자나 구매자에 의해 개별적으로 장식되거나 가구 배치를 할 수 있었다. 밀라노 중심가의 삼거리에 있는 극장의 외관은 상대적으로 평범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의 기둥으로 치장됐다.
스칼라 극장은 무엇보다 오페라에 맞는 훌륭한 음향과 아름다운 실내로 인해 순식간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지로 발돋움했다. 대규모 국가 행사도 이곳에서 열리곤 했다. 다만 전체 벽 면적의 40% 이상이 박스로 이루어짐에 따라 박스의 개구부로 인해 박스 내의 앞 열에서의 음향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반면 박스에 의해 반사된 음이 1층 객석의 음향을 더 밝게 만들었다. 스칼라 극장은 지어진 지 24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이탈리아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남아 있으며 지금도 성황리에 매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의 모든 성악가가 한 번쯤은 꼭 서보고 싶어 하는 무대로, 오랜 기간 많은 사람에게 꿈과 로망을 선사했다.
오페라가 탄생하던 때부터 오페라극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과 시도가 있었다. 당시의 문화와 경제 그리고 예술사적 기조가 바탕이 되어 시도됐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페라'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수용하기 위한 시각적, 청각적 수요가 우선됐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현대화된 기능과 설비를 갖춘 극장에서 과거의 오페라를 공연한다. 오페라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오페라극장은 오페라의 탄생으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한찬훈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이자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전 한국음향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아태지역 국제음향학회(WESPAC) 회장을 거쳤다.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부산 국립국악당, 광주 아시아 문화예술의 전당, 인천국제공항 등 100여 프로젝트의 건축음향 작업에 참여했으며 모두가 사랑해마지않는 서초 예술의전당 음악당을 비롯한 오페라극장, 리사이틀홀도 그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어쩌면 우리가 듣는 첫 음은 그가 그리는 종이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