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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Oct 20. 2021

트럼페터 최문규의 기록

찰나의 교감을 위한 콘체르토, Hob. VIIe:1



#I’m_ 나라는 사람


90년생 최문규

트럼펫을 시작한 건 열 살 때 우연히 교내 클럽활동으로 오케스트라 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어요. 아버지께서 “이왕이면 귀에 잘 들리는 트럼펫이 어떻겠냐”라고 제안하셨어요. 아무래도 소리가 선명하니 인상적으로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 말에 저도 흥미가 생겨 트럼펫을 선택했죠. 저는 초등학교 때 생활기록부에 ‘너무 활발하다’라고 쓰여 있을 만큼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고 축구나 농구 같은 액티브한 활동을 즐겨 했어요. 보통 그 나이엔 골 넣는 욕심이 클 텐데, 저는 좋은 어시스트로서의 역할이 좋았어요. 제가 패스를 잘해서 우리 팀이 골을 넣으면 더 기분이 좋더라고요. 운동 말고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 유독 뿌듯함을 느꼈는데, 이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아요. 지금도 뭐든 혼자서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는 게 더 즐거워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성향이 오케스트라를 할 때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어요. 가끔은 지나치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거나 관계와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거든요. 특히 화음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내 잘못이 아닐까’하고 소극적으로 굴게 되기도 해요.


트럼페터 최문규

어머니께서 “뭐든 꾸준히 해야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래서 6학년 때까지 트럼펫을 불게 됐죠. 그래 봐야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연주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오케스트라 지도 선생님께서 제게 대회에 나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게 굉장한 의미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준비해서 대회에 참가했어요. 그런데 그 대회에서 제가 1등을 한 거예요. 트럼펫에 재능이 있다는 걸 확인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주변에서 칭찬을 들을수록 트럼펫을 더 좋아하게 됐고, 트럼펫과 함께 있으면 제가 왠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개인 교습까지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중학생 때 광주시립교향악단에서 젊은 연주자와 협연을 위해 개최한 오디션에 참가해 첫 무대를 치렀어요. 제가 조금씩 성과를 보이니까 아버지께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지원해보자고 하셨어요. 목표가 생기니 더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운 좋게도 시험에 합격해 저의 고향인 여수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됐어요. 저는 그 순간 길이 정해졌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나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죠. 그 이후로 이 선택을 주저하거나 후회한 적은 없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트럼펫 캠프 중 (왼쪽에서 3번째)




#Music_ 개인적 취향


90년생 최문규 

음악을 한 이후로는 취미 하나를 갖더라도 항상 음악에 도움이 되는지부터 생각하게 돼요. 수영도 호흡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고, 1년간 새벽 수영을 꾸준히 했어요. 팬데믹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만두게 돼 아쉬워요. 대신 요즘은 틈틈이 달리기를 해요.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텅 빔의 시간'은 그 자체로 굉장히 휴식이 돼요. 그래서 뛰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꾸준히 하다 보니 체력도 좋아져서 악기를 하는 데도 도움을 받았죠. 


틈틈히 담아두는 운동 기록


종일 연주하고 늦은 시각에 귀가하는 날이면 악기 소리가 더는 듣기 싫어질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제가 하는 음악과는 결이 아주 다른 힙합 음악을 듣곤 해요.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땐 항상 분석하면서 듣게 되는데, 잘 모르는 분야의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주로 베이스가 탄탄하고 요란하기도 한 음악을 골라 볼륨을 크게 높여 듣죠. 저는 발라드보다 리드미컬한 팝이나 힙합 음악이 더 편안하게 들리더라고요. 가사가 덜 들리는 해외 음악을 찾게 되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에요.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음악을 좋아해서 통화연결음도 ‘Bad Guy’로 해 뒀어요.


트럼페터 최문규

요즘 트럼펫 곡 중에서도 ‘알프레드 데상클로(Alfred Desenclos)’의 ‘Incantation, Thrène et Danse’를 자주 들어요. 전공자가 아니면 화성도 이상하게 들리고 재미도 없는 곡들이 있어요. 이런 음악에서 편안한 감성을 느끼거나 감동은 받긴 어렵지만, 아무나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을 내는 연주자의 기교에 경탄하게 돼요. 끝까지 연주한다는 자체로 경외심이 드는 음악이에요. 오케스트라 반주에 트럼펫이 메인으로 연주하는 곡인데, 단순하게 들려도 실제로 연주하기엔 굉장히 까다로워요. 


알프레드 데상클로 ‘Incantation, Thrène et Danse’


베토벤의 ‘5번 교향곡’도 훌륭한 명곡이죠. ‘따따따 딴-’ 하는 멜로디도 멋지지만,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일품인 곡이에요. 화성적으로 완벽하게 맺어져 있고 구조가 확실하게 짜인 곡이라 어떻게 이 정도의 완성도를 구현할 수 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트럼펫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분께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어요. ‘올레 에드바르 안톤젠(Ole Edvard Antonsen)’이라는 노르웨이 트럼펫 연주자의 앨범<Desemberstemninger> 에요. 초등학생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선율이 단조롭지만, 같은 멜로디를 연주해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체감하게 해주는 앨범이에요. 꼭 한번 들어보세요.


올레 에드바르 안톤젠 ‘Away in a Manger’ ℗Musikkoperatørene





#Outlook_ 세계관


트럼페터 최문규 

‘트럼펫’ 하면 소리가 우렁찬 악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케스트라 안에서도 가장 귀에 잘 들리는 악기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연주자로서 트럼페터는 부담이 커요. 그렇다고 해서 트럼펫이 크고 강한 소리만 내는 악기는 아니에요. 굉장히 감미로운 소리도 낼 수 있어요. 트럼펫의 입체적인 면과 다양한 소리가 트럼펫의 매력이죠. 제 음악으로 인해 그 매력이 더 많은 분께 가 닿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방방곡곡 문화공감> 지방 공연에 가면 항상 김광현 지휘자님은 고정 질문을 객석에 던지셨어요.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행복해지시려고 오신 거죠?”, 공연이 끝나면 “오늘 행복하셨죠?”라고요. 저는 그 말이 정말 와닿았어요. 제 음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작은 위로와 행복이 될 순 있지 않을까 해요. 제가 타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듯이 다른 누군가도 제 음악에서 영향을 받으실 거라고 믿어요. 그런 면에서 연주자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직업이에요. 음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주변에 있어요. 없어선 안 될 존재죠. 지금도 누군가 당신을 위해 연습하고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코심 단원 최문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는 서울대학교를,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는 예술의전당을 꿈꿨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걸 알고 단원이 되고 싶었어요. 대학 졸업 이후에 마침 트럼펫 자리가 났더라고요. 유학을 고민하던 차에 바라던 자리가 나서 바로 도전하게 됐죠. 45:1 정도로 높은 경쟁률이었는데, 합격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지내는 동안 클래식 음악에 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깊이 사유하게 됐어요. 

요즘은 라이브 무대보다 음원, 영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오케스트라 무대에는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2016년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연주를 한 적이 있는데, 마침 그 이후에 영화관에서 공연 실황 영화를 상영하더라고요.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첫 음을 듣자마자 ‘괜히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좋은 음향 시스템을 갖췄다고는 해도 제 몸이 기억하는 음악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어요. 디지털 기기가 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직접 귀로 듣는 소리와 현장감을 온전히 느끼기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흔하다 못해 필수가 된 마이크조차 클래식 공연에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눈빛과 표정, 감정의 제스처, 그 공연장의 온기와 객석의 분위기 같은 것들은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클래식은 매끈하게 정돈된 음질과 풍성한 음향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트럼페터 최문규 

고등학생 때 무주의 한 스키장 야외무대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제가 체감한 관객 수는 2~3천 명 정도였어요. 빼곡히 찬 객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죠. 게다가 저는 학생이었고 능숙한 연주자가 아니었으니 더 떨렸어요. 그때 연주한 곡이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이었는데, 대중에게 익숙한 곡이라 아마도 청중들에게 제 실수가 눈에 많이 띄었을지도 몰라요. 무슨 정신으로 연주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연주를 마쳤는데, 많은 분이 추운 날씨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셨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박수받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굉장히 벅찬 기분이었어요. 솔리스트로서 그렇게 큰 무대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던 것 같아요. 내 연주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더 완벽히 준비된 연주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요. 항상 무대를 책임질 수 있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코심 단원 최문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입단 후에 했던 첫 무대가 아직도 선명해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8번’이었어요. 이 곡의 4악장이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하거든요. 원래 트럼펫 주자 두 명이 그 부분을 연주하는데, 지휘자님께서 “우리 트럼펫 단원이 셋이니까 한번 같이 해보자”라는 깜짝 제안을 하셨어요. 심장이 뛸 만큼 좋았지만, 온전히 트럼펫 소리만 들리는 대목이니 엄청난 부담도 따랐어요. 정말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 올랐어요. 트럼펫 대목이 끝난 후 지휘자님께서 저희를 향해 엄지를 살짝 들어 보이셨어요. 그날의 안도감과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오케스트라 무대는 지휘자와 단원들과의 약속을 이뤄낸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 찰나에 이뤄지는 교감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에요. 어떤 지휘자님은 그럴 때마다 살짝 비치는 미소가 있으시기도 하고요.

저는 퍼스트 트럼펫을 보조하는 세컨드 트럼펫을 주로 담당해요. 아무래도 퍼스트가 리듬과 음정 처리할 때 저는 최대한 빠르게 눈치를 채고 합을 맞춰야 해요. 매 순간 단원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는 게 목표에요.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은 소리는 크지만, 비중은 크지 않아요. 곡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2시간 공연 중 트럼펫은 10분에서 20분 정도만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요. 늘 쉼표가 있는 악기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하는 실내악 공연 중에 다섯 명이 하는 ‘브라스 퀸텟’ 구성이 있어요. 지난 7월에 열린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에서는 3중주로 풀랑크의 소나타를 연주했어요. 실내악은 오케스트라 무대에 비해 쉬는 마디도 없고 다양한 부분을 연주할 수 있어서 욕심이 나요. 앞으로도 여러 무대에서 좋은 음악 들려드릴게요.


풀랑크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을 위한 소나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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