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공중목욕탕은 내게 있어 그저 공포 그 자체였다. 엄마가 행여 목욕탕에 가자고 하실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날이 있는데 한 번은 엄마의 강권과 설득과 협박에 떠밀려 결국 목욕탕에 가기로 '큰'맘을 먹은 것이다.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마지못해 목욕탕까지 갔는데 세상에! 그날따라 행운의 여신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던 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그날은 목욕탕 휴업 날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엄마 옆에서 따라가던 나는 비로소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당시 난 단순히 때를 미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라, 모두가 자연인(?)의 모습으로 다 함께 목욕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상황이 그저 부끄럽고 어색하고 피하고 싶을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백희나 작가님의 '장수탕 선녀님' 그림책에는 나와는 아주 다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덕지는 냉탕에서 물놀이하는 것이 세상 재미있는 천진난만한 여섯 살 어린이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 엄마와 '장수탕'에 가는 덕지는 냉탕 물놀이가 즐거운만큼 때를 불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온탕이 두렵기 짝이 없지만, 때를 잘 밀고 나면 '요구르트'를 사주겠다는 엄마의 한마디에 뜨거운 온탕도 다 참아내는 기특한 어린이이다.
이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목욕탕을 소재로 이렇게 재미난 그림책을 만들어내신 백희나 작가님의 상상력은 가히 범접 가능한 영역에 있지 않는 듯하다. 냉탕에서 놀던 덕지는 그곳에서 '선녀님'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가 익히 어린 시절 읽어봤던 '선녀와 나무꾼'에 등장하는 바로 그 선녀님이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날개옷을 잃어버린 김에 에라 모르겠다 이 연못에서 평생 목욕이나 하며 살자는 아주 쿨내가 진동하는 멋진 선녀님인 것이다.
세기를 거듭하며 목욕만 하신지라 우리가 상상하던 야리야리한 선녀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다. 물이 좋다던 그 연못은 '장수탕'으로 변모하였고, 자연스레 선녀님은 목욕탕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아주 재미난 이야기의 설정에 딸아이도 읽어줄 때마다 너무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이 재미난 책이 뮤지컬로 탄생했다. 나로서는 더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이 뮤지컬이었다. 사실 지난여름 방학에 아이를 데려가 보여줬는데, 아이가 즐거워했던 것은 물론이고 실은 내가 너무 재미나게 봐버렸다는 게 좀 더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핑크퐁 상어 가족 같은 어린이 뮤지컬을 여러 차례 관람해왔는데, 이 장수탕 선녀님 뮤지컬은 그에 비하면 한 차원 위에 있는 아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고백하건대 우리 집은 이 뮤지컬 티켓 구매를 여태 세 차례나 했다. 물론 재관람 할인 50% 적용 덕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아이도 나도 너무 즐거운 관람이 되기 때문이다. 단 한 시간 동안 그 안에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둔 데다 음악 구성이 아주 훌륭하다. 어린이 뮤지컬이지만 나는 특히나 너무 신나는 '요구룽' 넘버를 아주 좋아해서 자주 OST를 틀어두고 따라 부르기도 한다.
아이가 냉탕에서 놀다 감기가 걸리는데, 밤새 끙끙 앓는 아이를 바라보며 덕지 엄마가 부르는 '감기'라는 넘버 속에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뼛속까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진한 가사에 그 짧은 순간에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동이 가득하다. 그에 이어 아픈 덕지를 찾아온 선녀님이 부르는 '아픈 만큼 쑥 커라' 넘버 역시 이미 열린 눈물샘을 주체 못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기획하고 만들어내신 모든 분들께 진심 큰 박수를 보내드렸다. 짧은 순간 감동이 스치고 지나는 것뿐만 아니라 시작부터 재치 가득에 유쾌하기 짝이 없는 대사들이 공연을 보는 내내 웃음보를 터트리게 만들어주니, 어찌 아니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도 한때 호주 오페라단 소속이던 시절, 어린이 오페라 공연에 관여를 했었다. 당시NSW 주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어린이 공연을 여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도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어린아이들(및 어른들)은 이런 문화생활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사실상 너무 제한적이라는 점 하나에,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를 접하게 된다면 장기적 관점으로 봤을 때 잠재적인 오페라 관객 양성이 된다는 점이 또 다른 하나의 이유였다. 어려서부터 이런 콘텐츠에 노출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관객으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인 것을 진즉부터 그들은 알고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공연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다. 그야말로 돈을 벌려면 '아이들'을 타깃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다. 우후죽순 생기다 보니 어떤 것들은 돈이 아까운 허접한 공연도 있다. 그러나, '장수탕 선녀님' 같은 고퀄리티의 공연들은 정말 한 번쯤은 꼭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수작이다.
단순히 작품이 좋은 것뿐만 아니라, 공연을 보러 들어가기 전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포토존이 정말 볼만한데, 내가 어린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진짜 목욕탕의 모습들을 그대로 재현해두었다. 어른들은 향수에 젖을 수 있고, 아이들은 신기한 고대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우리 동네에도 아주 '클래식'한 목욕탕이 하나 남아있긴 하다. 작품에도 등장하지만 현대에는 단순히 목욕탕이라기보다 찜질방의 기능까지 더해져 다양한 휴식의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된 경우가 더 많은데, 좋지만 뭔가 오래된 목욕탕에서 느껴지던 푸근함은 다소 부족한 듯한 건 기분 탓일까.
어차피 어린 시절 목욕탕을 즐겨 출입해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동네마다 볼 수 있던 빨간 벽돌의 목욕탕 굴뚝들이 사라지는 건 왠지 아쉬운 기분은 든다. 이렇게 장수탕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중에도 선녀님을 소환하여 우리에게 추억과 감동을 전해주는 백희나 작가님 같은 분들이 있어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그런 추억이 없지만 남편은 아직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목욕탕에 다녀오며 마시던 하얀 우유의 추억을 종종 떠올리곤 하는 걸 보면, 우리의 기억 속에 목욕탕은 분명 그 후끈한 열기만큼이나 강렬하게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사라져 가는 장수탕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 선녀님들도 모조리 사라져 가지는 않기만을 바라며, 날도 추운데 선녀님이 너무 냉탕에만 계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 하나를 더해본다. (무릎이 너무 시릴까 봐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