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 시기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늘 화창했고 집에는 덩그러니 사람만 있었다. 아마도 우리 이삿짐은 열심히 남반구를 향해 태평양을 종단 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머물던 유닛 하우스는 시드니의 북부 지역 노스 쇼어(North Shore)에 위치한 킬라라(Killara)라는 동네에 있었다. 집 앞으로는 바로 퍼시픽 하이웨이(Pacific Highway)가 있어 늘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그런 곳이었다.
시드니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와 나는 랭귀지 스쿨에 다니기 시작했었다. 정규 학교 과정에 합류하기 전 필수적으로 거치는 통과의례였다. 첫날 영어 레벨 테스트를 받았는데 당시 뭐라고 떠들어 대는 테이프를 틀어주고 간단한 문제지를 주며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지 단어를 받아 적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영화 상영 스케줄을 읊어주는 패시지였던 것 같은데, 다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바로 '스타워즈'이다. 스타워즈 영화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모처럼만에 알아듣는 단어가 귀에 딱 꽂히는 순간 반갑게 적었는데, 이렇게 적었다. 'Star Waz'
그러니까 스타워즈 영화는 너무 잘 알지만, 그게 Star Wars 인건 그때까지도 몰랐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나름 중학교 과정 내내 영어 1등 놓치지 않았는데, 나의 무식이 통통 튀는 답안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당시 리스닝 공부 안 시켰던 한국 영어 교육과 미국 영어같이 'R' 발음을 강하게 하지 않는 *오지(Aussie)식 영어가 문제였다고 해두자.
*호주인들은 단어를 줄여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들 스스로를 Aussie (Australia)라고 부른다.
호주는 아주 오랜 세월 '백호주의'를 고수했던 나라로,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차별이 심해서 어떻게 사냐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1770년에 영국의 탐험가 캡틴 쿡이 호주 대륙을 발견한 이후, 영국인들이 죄수들을 이주시키면서 호주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애초 호주 대륙의 토박이였던 원주민들을 탄압했던 사실은 현재까지도 호주인들이 '반성'하고 있는 부끄러운 역사다. 우리 가족이 호주로 건너갔던 1990년대에는 한창 중국으로 반환을 앞두고 있던 홍콩의 국민들이 대거 캐나다 또는 호주로 이민을 감행하고 있던 시기였던 지라 내가 다니던 랭귀지 스쿨에도 홍콩에서 온 아시아인 친구들이 정말 많았었다.
여하간 이민자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던 시기라 어딜 가던 내가 동양인임이 그다지 낯설어야 할 일은 아닌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만고의 진리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똥개도 지 구역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똥개가 지 구역을 벗어났으니 어딜 가나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괜히 주눅이 들고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머물던 유닛 하우스에는 말하자면 소위 '반장'과도 같은 할아버지 한분이 거주하고 계셨는데, 동양인 가족이 이사 들어온 게 신기했던 건지, 아니면 인종과 상관없이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과잉 친절(?)이었던 건지, 아니 그도 아니면 말 그대로 '인종차별'이었던 건지, 늘 우리 가족의 행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참 많으셨던 듯하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던 우리 집에 현지에서 구입한 식탁이 들어오고, TV와 당시 필수품이었던 비디오 플레이어가 거실에 덩그러니 놓였다. 그런 와중에 잠시 머물기로 했던 그 집에 커튼을 달수도 없고 오후만 되면 햇빛이 내리꽂는 커다란 부엌 창문 앞에서 도저히 눈이 부시고 뜨거워 뭔가를 하기가 힘드셨던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궁리 끝에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주셨더랬다. 그러나 그 신문지가 채 하루를 넘기지도 못하고 떼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반장 할아버지가 그러면 안된다고 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미관상 보기가 좋지 않으니 붙이지 말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우리 집 일에 무슨 상관이냐 내 맘이지!라고 하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입장을 설명하며 맞설 만큼 영어에 자신이 없었고, 아닐 말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다고 그 나라에선 그냥 그렇게 해야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군말 없이 깨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더 웃긴 건, 신문지를 붙인 건 어쩜 그렇게 귀신같이 바로 알았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리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뭔가 우리 집에 변화가 생기면 반응이 그렇게도 즉각 이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돌이켜보면 그게 정말 인종 차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는 아주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좀 달리 보면 사실 은퇴 후 할 일이 없으신 아주 심심한 노인 한 분이 새로 나타난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고, 그래서 시시콜콜 참견을 했던 것일 수도 있는 건데 말이다. 당시에는 그게 다 내 구역이 아니라 설움을 당한다고 생각했었더랬다.
반장 할아버지와 얽힌 크고 작은 웃픈 사연들은 그 외에도 꽤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 게 그렇게도 눈치가 보였었다. 실제 냄새가 난다고 뭐라고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지금쯤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실 반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눈치를 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역만리 그곳에서 귀하디 귀한 김치를 찌개로 끓여먹는 건 정말 꿀맛이었다. 역시 무엇이든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건 더 짜릿한 것 같다. 뭐라 한다고 안 먹을 김치찌개가 아니지 않은가. 어디 한번 고약한 냄새 좀 맡아봐라! 싶었다. 영어로 맞서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냄새로 억울함을 갚아줬다고나 할까. 역시 우리의 음식 김치는 진정 여러모로 강력한 무기이다.
호주 집들은 대체적으로 방이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큰 방을 가진 집들도 있긴 하지만 보편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싱글 침대가 정말 좁았는데, 사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일반 싱글 침대보다 더 좁아서 처음에 사실 많이 놀랐었다. 그래도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던 집에 침대가 들어오던 날 어찌나 반가왔는지 모른다.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침대라니! 그게 좁아서 놀라웠다는 사실만 빼고는 정말 너무 소중할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 딱 하나 있는 침대. 극도의 미니멀리즘이었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서 자는데 그냥 팔을 양옆으로 내려놓으면 거의 침대 끝자락이었다. 그래도 자면서 한 바퀴씩 양옆으로 좀 굴러줘야 잠 좀 잤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건 그 어디로도 굴러갈 여분의 자리 따위는 없었다. 옆으로 눕고 싶다면 그 자리에서 아주 자알 몸을 돌려야만 했다. 마치 꼬치구이를 하듯이...
그것도 잠이 들기 전의 이야기일 뿐, 사실 잠이 깊이 들고 나면 꼬치구이 기술 따위를 떠올릴 겨를이 어디 있던가.. 커튼도 없는 그 환하디 환한 창문 사이로 휘영청 달이 밝았던 그 어느 날 밤, 나는 아주 잠시 허공의 바람을 맛보고 바닥을 찍었다. 그나마 카펫 바닥이라 덜 아팠던 것 같다. 그렇게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멍하게 잠시 앉아있다 다시 산을 타듯 좁고 높은 침대로 기어 올라가던 밤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 이후 나는 침대에 누우면 절대 돌아눕지 않았다. 똑바로 누워 팔을 양옆으로 내린 후 손으로 매트리스 끝자락을 살짝 잡고 잤다. 그래서 아주 오랜 세월 똑바로 누워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아이한테 밟히거나 눌려서 자는 게 일상 다반사인 듯하다. (차라리 그 좁았던 침대가 더 나았던 거 같다)
그 아무것도 없던 작은 방 침대에 앉아 UB40의 Kingston Town과 Extreme의 More than words 등 당시 정말 인기 많았던 팝송들을 많이 들었었는데, 지금도 그 음악들을 들으면 그때의 기분이 묘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그렇게 하나하나 열심히 적응해 나가던 그때 그 시절 내 모습이 기특하고 아련하게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