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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Jul 20. 2021

죽 한 그릇은 사랑이다.

지난밤에 머리가 깨지도록 아파 잠이 깼다. 도저히 그냥은 계속 잠을 청할 수가 없어 진통제를 집어삼키고 누웠는데, 머리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아파지는 것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위장이 곧잘 탈이 나곤 하는데, 먹은 것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기가 있는 상태에서 내가 약을 털어 넣은 모양이었다. 결국 손가락도 따고, 걸려있던 약과 마신 물까지 모두 다 쏟아 올리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새벽 기상이고 뭐고 구토로 인해 실핏줄까지 다 터진 흉한 얼굴로 늦은 아침까지 뻗어 자고 있는 마누라 몰골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겸사겸사 하루 쉬겠다며 휴가를 내고는 조용히 흰 죽을 끓여 내왔다. 원래 설거지는 해도 요리는 절대 '못'하는 사람이건만, 쌀에 물 넣고 푹푹 끓이는 건 그래도 잘해서 속탈이 날 때마다 그가 끓여주는 흰 죽은 아픈 와중에도 그렇게 맛이 좋다. 아마도 그 마음까지 정성스레 담겼기 때문이리라.

절대 요리를 안(못)하는 남편과 살다 보니, 이렇게 흰 죽이라도 끓여줄 때가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다. 몸이 아프면 안 되지만, 가끔은 한 번씩 탈이 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해 주니 말이다.




죽을 떠먹다 보니 그 옛날 어느 때가 떠올랐다.

내가 고작 11~12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날따라 엄마는 밖에서 늦은 시각까지 뭔가 일이 있으셔서 부재중이셨는데 퇴근해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 모습이 너무 안 좋아 보였다. 몸살에라도 걸리신 건지 창백한 얼굴에 아픈 기색이 역력한 것이었다. 내가 아프면 엄마는 곧잘 흰 죽을 끓여 주시곤 했는데, 그냥 멀건 죽이 무슨 맛이냐며 가끔은 새우젓을 약간 넣어 짭조름하게 간이 베인 맛있는 죽을 끓여주시곤 했다.

아픈 아버지를 보고 엄마가 해주시는 죽이 떠올라 나는 바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밥에다 물을 잔뜩 붓고는 새우젓을 한 숟갈 넣고 휘휘 저었다. 간을 보겠다며 조금 떠서 먹어보는데, 아무런 맛이 안 느껴진다. 그래서 새우젓을 한 숟갈 더 넣었다. 또다시 휘휘 저은 후 간을 봤다.

'어라, 이쯤 되면 짭조름 간이 배었어야 하는데 이게 왜 이리 싱겁지'

주저 없이 한 숟갈을 더 넣었다. 그리고 먹어보니 뭔가 조금 간이 든 것 같다.

살살 저어가며 끓이는데,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죽의 색깔이 뭔가 심상치가 않다. 엄마가 끓여주시는 새우젓 넣은 죽은 하얀 색깔에 아주 간간이 새우젓이 작게 보였는데, 이 죽은 전체가 분홍색인 것이다. 왜지?


잠시 후 죽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짜도 짜도 너무 짜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분명 간이 안 배어서 또 넣은 건데 아마도 그게 바닥에 다 가라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너무 속상한 나머지 훌쩍대며 아버지께 실상을 말씀드렸다. 맛있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 꼴이 되고 보니 세상 너무 서럽고 속상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짠 분홍색 죽을 아버지는 괜찮다며 어느 정도 드셨던 생각이 난다. 아프면 으레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죽이다 보니 기껏 생각해드린다고 한 건데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양의 나트륨 섭취만 도와 드렸을 뿐....




저녁에도 흰 죽을 끓여줄까 하는 남편에게 우리 집 꼬맹이 한단 소리가 야채랑 고기가 들어있는 그런 죽이 먹고 싶단다. 죽집에서 사 오는 죽을 말하는 거다. 예전에 배달이란 게 없던 때에는 죽집에 전화해놓고 찾으러 가곤 했었는데, 요즘은 사실 배달앱으로 간편히 해결이 되니 몸이 아파 움직이기 힘들 땐 참 좋단 생각이다.

옛날 같아서야 누가 죽을 돈 주고 사 먹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싶지만, 그야말로 세상이 참으로 다양해지고 좋아졌다.


꼭 한 번씩 이렇게 내가 탈이 나면 식구들도 다 같이 본의 아니게 죽을 먹는 날이 되곤 한다.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고맙게도 모두 죽이 좋다 해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의 마음이 담긴 흰 죽도 감사하고 맛있지만, 그래도 입맛이 좀 살아나 저녁엔 삼계죽, 전복죽, 호박죽을 소량씩 주문했다. 여러 가지를 놓고 먹으니 가끔씩 먹는 죽도 참 맛이 있다.


음식이야 뭐가 됐든 남이 해주는 건 다 맛있기 마련일진대, 몸에 탈이 났을 때 먹는 죽은 참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서툴게나마 쌀에 물 가득 넣고 푹푹 끓여준 죽 한 그릇 만으로도, 마음은 따뜻해지고 이미 다 나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혼자서 아픈 것처럼 서러운 게 없는데, 예전 유학시절 혼자 끙끙 앓았던 기억들이 있어 이렇게 죽 한 그릇에도 큰 의미를 담고 더더욱 감사하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 옆에서 챙겨 준다는 그 온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바로 '죽'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 탈이 날 때마다 하얗게 죽 끓여 간장종지에 참기름 간장을 같이 놓아주시던 우리 엄마의 손길이 떠올라, 그렇게 흰 죽을 마주할 때마다 아련한 느낌에 젖어들곤 한다.

우리말 속담에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도 하고, 뭔가 속된 말로 '죽'을 빌어 과격한 표현들을 하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몸과 마음이 가장 여리고 약한 순간에 위로를 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 먹을 일이 자주 생기지 않아야겠지만, 이렇게 또 탈이 난 덕분에 죽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옛날 우리 엄마로부터 나에게, 나로부터 우리 아버지에게, 또 지금의 우리 남편으로부터 나에게, 죽을 통해 전해진 따뜻한 마음들을 떠올리며 잔잔히 행복감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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