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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곰 Jan 05. 2021

'백수' 구직 때문에 구걸하다

[시간이 멈춘 방-현실편]

求 (구할 구) 1. 구하다 2. 빌다, 청하다 3. 탐하다


구직하다= 일정한 직업을 찾다. 

구걸하다= 돈이나 곡식, 물건 따위를 거저 달라고 빌다. 


한 끗 차다. 대상이 다를 뿐 무언가 얻기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타인의 의지로 '구직'이 '구걸'이 되는 건 순간이다. 동냥은 못 할 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했는데, 세상 일 참 얄궂다.




1년 하고도 10개월. 수레의 바퀴가 돌아 제자리에 섰다. 덜 여문 곳이 남았지만 땅을 다지며 구른 탓에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파리 목숨보다 값싸게 취급받던 직장인의 삶을 노크했다.


오해 마라. 비하하지 않는다. 직장인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희생이 있어야만 최소 가능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아니면 돈이든, 명예든. 뭔가 이유가 확실해야 한다. 




말이 살찐다는 가을,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낯선 모습. 오랫 만에 입은 정장이 몸을 조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채 잡히지 않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죽 솟았다.


며칠 전 걸려 온 한통의 전화. 상대가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입사 면접 얘기. 귀국 후 재입사 한 B와 달리, 나는 방랑과 정착 사이 '자아 찾기'라는 구실로 자리를 뭉갰다. 


하지만 이젠 일이 고팠다. 필요했다. 경제적 자유보다 현실에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전화를 끊었다. 혹자의 걱정인 '나태함·적응'의 문제는 없었다. 금세, 입사 후 역할에 대한 고민이 머리를 채웠다.


면접 당일, 도착한 빌딩. 자신감은 충만했다. 하지만 뭔지 모를 불안의 씨앗이 가슴에 자리했다. 입 안이 까슬했다. 5년 전 끊었던 담배가 당겼다. 고개를 털어 상념을 지웠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회사로 향했다.


"미안. 너 면접 볼 때 난 다른 회의가 있어서..." 시계를 들여다보던 선배는 면접장에 날 밀어 넣었다. "나랑 일해 보는 거 어때? 그냥 간단히 면접 보는 거야. 부담 갖지 마" 며칠 전 들었던 선배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멍청히 서 있다 떠밀렸다. '사자 우리'였다. '간단하다'는 면접장엔 편집 국장과 각 부서장이 자리했다. 여럿이 한 명을 괴롭히기 딱 좋은 자리 배치.


포식자의 여유로움과 삐딱함이 묻은 자세였다. '어디부터 밟아줄까'라는 눈빛으로 모두가 날 쳐다봤다. 믿는 도끼에 온몸 찍힌 기분이 이럴까. 눈 밑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려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숨을 골랐다. 사무실 바닥의 차가움이 전해졌다. 눈을 깜빡였다. 상상했다. 1번, 2번, 3번. 갈수록 그들의 모습이 변했다. 어느새 내 앞엔 '어글리 비스트'들이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머릿속 상상으로 긴장이 풀렸다. 


단단한 줄 알았던 맷집은 여전히 약했다. 하지만 발버둥 쳤다.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에게 잡혀도 빠져나가기 위해 수없이 발길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다. 이 발길질로 육식 동물의 이빨에서 벗어나거나 간혹 그들을 다치게 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도.


면접이 시작됐다. 그들은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린 손도 가지런히 모았다.


왜 이곳에 입사하고 싶은 거죠? 입사 지원 동기가 뭔가요?

저희가 지원자를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럼 나열해 보세요

2년 공백이 있는데 우리가 뭘 믿어야 하는 거죠?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 보세요


"여행으로 돈 다 쓰고, 이제 돈 없으니 취업하려는 거 아닌가요?" 


'표정 관리 좀 잘하지.' 질문과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상한 선비인 척하더니 틈만 보이면 대거리하려는 유전자를 그들이 감추지 못하고 드러냈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돌려까고, 이젠 취업 구걸하러 온 거지새끼 취급이다. 어떤 발길질이 필요할까. 우선 '왜 이곳에 입사하고 싶은 거죠?부터 정정하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회사다. 하지만 같이 일해 보잔 선배의 말에 끌렸다. 잘(!) 일하고 싶은 갈증을 풀어 줄 사람이라 믿었다. 그리고 간단한 면접만 보면 된다는 말에 나섰다. 


이해를 돕자면, 비정기적인 경력 기자 채용은 데스크인 부장이 미리 면접을 보고, 적임자를 물색 후 편집 국장 보고와 재가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 편집 국장 면접은 인사 정도다. 


그런데. 이런 식의 면접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닙니다"라는 나의 대답은 이미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내가 믿은 게 기자라는 게 실수였다. 욕지기가 치솟았지만 참았다.


"2년 동안 여행했는데 국내 돌아가는 상황은 알아요?"


질문 수준 참 낮다. 한숨이 나왔지만 속으로 삼켰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국내와 국제를 구분하는가. 스마트폰 메인 화면을 차지하는 애플리케이션 폴더 하나가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고, 기본적으로 보는 게 뉴스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갖고 있지 않은 부동산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고, 불장된 한국 부동산 시장을 살피던 친구와의 카카오톡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여행 중이라도 모를 라야 모를 수 없었다. 


"네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면접자로서 최대한 공손했다. 얘기의 포인트는 계속 돌았다. '입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넌 검증이 안 됐으니 우리를 잘 설득해봐'였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직원 한 명 잘 못 채용하면 어떤 고생하는지, 나 역시 잘 안다. 하지만 문제는 '적당히'를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오고 싶다고 엎드려 절하고 빈 것도 아니고, 면접만이라도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읍소한 것도 아닌데 신기하고 조롱하기 좋은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가지고 놀았다.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 보세요"


그 정책 알면 내가 지금 여기 왜 있겠나. 듣자마자 도망가는 어이부터 잡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안다. 기본적으로 어떤 정책이 필요하고, 어떤 상황이 맞물려야 하는지. 다만 국내외 상황 감안 시 당장 해결은 어렵다고. 

 

'정책 제시 포기'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한참 풀어 설명했다. 근데 면접관이 단체로 졸았나. 내가 한 얘길 그대로 본인들 생각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정책 실현이 어렵다는 경제적 상황까지 똑같이 들면서. 


"제가 이런 상황과 이런 상황이라서 당장 실현이 어렵다고 이미 말했는데요"


듣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랬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니깐" "이러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그건 어려워" 내가 쌓은 탑 위에 하나 둘 숟가락을 얹었다. 면접장이 시장통으로 변했다.


"그래서 어떤 정책이 있다는 거죠?" 쇠귀에 경 읽는 기분이었다. 본인들 귀에 달콤한 것만 듣고 싶은 건지. 나라는 사람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 유튜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질문자의 목소리 톤과 함께 어깨가 솟았다. 트렌드를 따랐다는 자신감인지. 콘텐츠에 대한 자부심인지. 하지만 이유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선의로 물었다. 그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발길질을 시작해보자. 표정 한번 볼만했다. 비웃음을 흘리던 얼굴이 똥 씹은 얼굴로 바뀌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채널을 키울 생각인가요? 뭘 말하고 싶은 건가요? 콘셉트는 있나요?"


분위기가 '시장통'에서 '상갓집'으로 바뀌었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적막감만 감돌았다. 물음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쾌함만이 담긴 기침이 터졌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불편한 면접이 끝났다. 면접자로서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누군가 잡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밑바닥을 먼저 보여줘 다행이다. 하마터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뻔했다. 그들 덕분에 오늘 나의 '구직'은 '구걸'이 됐다. 방랑과 정착 속에서 자발적 백수에 한발 더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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