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호구 조사는 여행 중 필연적으로 이뤄진다. 유대감 형성이 목적일 수도 있고, 상대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다. 어쩌면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목적을 떠나 이는 쉼 없이 이뤄진다.
"몇 살이세요? 고향은요? 한국에선 어디 사셨어요? 결혼은 하셨어요? 옆에 계신 분은 여자 친구(남자 친구)인가요? 아니면 배우자? 직장은요? 숙소는 어디세요? 내일은 뭐 하세요? 장기 여행은 왜 하시는 건가요? 여기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여행 중 어느 날, 어느 도시였다. 한국인을 만났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 가시지 않은 시간, 나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여러 궁금증이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마치 속사포 랩처럼. 흔한 전개였다. 사방으로 튀는 침방울 만이 그의 진지함을 대변했다.
큰 의미는 없었다. '궁금증'이라는 명제 해소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때론 불편했다. '설마 이런 걸 물어보겠어'라는 질문이 튀어나오곤 했다. 우리 집 세간살이까지 궁금한 건 너무 나간 행동이지 않나.
나의 여행 경험담이 모든 걸 일반화할 순 없다. 하지만 경험을 비춰 얘기해 본다. '라떼'와 '꼰대' 문화를 비판하며 쿨내 나는 척해도, 우리나라는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서열 정리가 확실했다. 첫 만남에 나이부터 묻는 게 그런 연유다. 이어 지역과 직업 등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려 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대답을 강요한다. 의도를 떠나 대답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짜게 식는다. 선택지가 없다. 한국에선 꼰대들의 '강요'와 '억압'에서 벗어나자던 사람도 이 대목에선 갈린다. "해외에 나와 의지할 건 우리나라 사람밖에 없다. 그러니깐 넌 대답해라" 이 신기한 논리 아래 합법적 신상 털기가 시작된다.
최근, 여행자 사이에서 '신상 털기' 분위기는 변했다. 공통분모를 찾는 사람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여행 목적으로 '익명성'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떠난 '한 명의 여행자'로 주변에 녹아들고 싶어 한다. 때문에 애초에 한국인이 모이는 자리를 피하거나, 같이 자리해도 말을 아낀다.
나이와 이름은 말해도, 특정 질문은 피하려는 사람도 있다. '한 다리 건너 한 다리'라는 말처럼 한국이 생각보다 좁다.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거리 상 문제는 크지 않다.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나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는 날 알고 있다. SNS 친구가 실제 현실 친구나 가족보다 나의 동선과 상태를 더 잘 파악한다. 어느 날 저녁. '톡톡톡톡' 다들 손가락이 바빴다. 나의 소개를 마칠 때쯤 들려온 건 스마트폰 자판 두르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띵동' 000님이 친구 추가하셨습니다.
"직업은 묻지 마세요" 그의 말이 끝나자, 자리를 함께 한 사람의 표정이 제각각 변했다. 공기는 무거웠다. 그는 어색함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멀어졌다. 철저히 주변인이 됐다. 불편하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음이 뭐가 문제인가.
다음날, 주변을 맴돌던 그가 다가왔다. 얼굴은 이미 지쳤다. "저는 선생님이에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직업을 숨긴 이유가 흘러나왔다. 직업을 듣고 난 뒤 사람들의 '반응'이 무서웠단다. 안다. 같은 얘기를 달리 해석할 수도 있고, 모두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걸.
'대답이 꼭 좋은 쪽으로만 연결되지 않다'는 걸 학습한 결과다. 혹자들은 '반응이 뭐가 문제냐' 할 수 있지만 요즘 선생님은 SNS 프로필도 맘대로 설정하지 못한다. 이유는 '구설'이다. 학부모의 항의할 수 있다는. 같은 맥락이다. 선생님이 해외여행을 간다는 자체도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의 본보기, 타인의 모범. 말 그대로 선생님은 모두의 삶의 가치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과 절대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사실 불가능한 말이지만서도. 상대는 그런 요구를 당연시한다. 때문에 누군가 어떤 선입견을 가질지 몰라 직업을 숨기는 것이다.
선입견? 포인트는 외박이다. 당일치기 여행을 제외한 모든 여행에 따른 것이다. 해외여행은 당연한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집 밖에서 자야 한다'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상황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웃기지만 누군가의 상상 속에선 막장 드라마까지 펼쳐질 수 있다.
"해외로 여행 갔어요? 어디로요? 그런 위험한 곳으로요? 혼자요? 그럼 누구랑? 며칠 동안? 가서 뭐했어요? 집에서 별말 안 해요? 갔다 와서는 어때요?"
정말 단순한 궁금증인가.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비켜 생각해 본다. 함의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포인트는 철저히 '이성과의 동침'이나 '일탈'이다. 부정적 요소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거나 그 범주 안에서 이뤄지는 물음이다.
"그래서 그냥 회사원이라고 말하는 게 편해요. 가끔 누군가 "좋은 회사 다니시나 봐요? 휴가도 많이 주고 돈도 많이 주고"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해요"
초면인 중년의 남성이 물었다. "남자에게도 나이는 숨기고 싶은 비밀입니다"라고 반항해 봤지만 유교 사상이 너무 뿌리 깊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00살입니다" 졌다.
중년 사내는 인상부터 썼다.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놀러 다니고 편하면 안 되는데 그럼 소는 누가 키워" 나름 유머를 가미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젊어 고생하고 우리나라 경제에 이바지하고 나이 들어 한가롭게 여행을 다녀야 한다. 출산율도 낮은데 애도 낳고 그래야 한다'.
그냥 '부럽고 샘난다'고 말하면 될걸. 대한민국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본인이 계도에 나섰다. 장기 여행자를 보는 시각도 마뜩잖다. 직업이 없기에 가능한 일인데, 직업이 없는 한량이 됐다. "무슨 돈으로 여행해? 금수저인가? 주식으로 대박 났나?" 무의미하고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여행 중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다양한 외국인을 만났다. YOU. 존대가 사라져 모두가 친구였다. 70대 할아버지와의 자연스러운 어깨동무. 60대 중년과의 격 없는 대화. 서로에 대한 질문도 쏟아졌다.
'신상 털기'? 아니다. 나를 둘러싼 겉껍질이 아닌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한 질문이었다. "뭘 좋아하니? 어떤 게 좋았니?" 특정한 이슈를 논할 때 직업을 말하기도 했다. 이 경우 '나의 관점으로 이슈를 어떻게 보는지' 순수한 궁금증만 표했다. '직업=돈'으로 귀결되는 질문은 없었다.
각자의 여행 목적은 다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해 새로운 걸 찾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일 수도,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찾아 떠난 사람일 수도 있다. 주변인이 될 필요가 있다. 본인 방어와 위로(자위)를 목적으로 한 호구조사는 필요하지 않다. 그것도 겉껍질만을 위한 것이라면 지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