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체르노빌 원전 사고, 미녀 검찰총장,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 러시아와 맞짱
동유럽 국가인 '우크라이나'. 비옥한 땅·풍부한 인적 자원·세계 최강 군사력을 이유로 발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언론인 암살·부정 선거. 말만 들어도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고 세계 금융 위기·러시아와의 전쟁의 여파로 사회 전반이 어렵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유럽 내 빈국에 속한다. 1인당 GDP는 3,659달러로 스리랑카(3,853달러)보다 낮다. 평균 월급은 60만원 수준. 소매치기·강도 등 생활 범죄가 들끓는 이유다. 초강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지만 실상은 바닥이다. 최근 IT 열기와 가상화폐 유명세는 또 다른 얘기다.
각설하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아름다운 도시'였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북적였고, 곳곳엔 볼거리가 넘쳤다. 탁 트인 광장·동유럽 특유의 건물·길거리에 설치된 조형물.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한쪽에선 노신사의 연주가 이어졌다. 어느새 자리를 차지한 우린 멜로디에 빠졌고, 얼마 후 또다른 즐거움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손은 눈보다 빨랐다
해가 산 너머로 얼굴을 감출 때. 다음날 일정 준비를 위해 마트로 향했다. 나라별 마트 구경은 여행의 또다른 재미였다. 그 나라 기호와 물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이자 군것질거리를 얻을 기회의 땅이었다. 아이들이 마트에서 떼를 부리듯 나 역시 군것질 사수 작전에 돌입했다.
'10개 말하면 하나는 사주겠지?' 즐거운 망상에 빠져있을 때쯤. 짧은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난 바닥에 주저앉은 B를 보았다. 낯선 동양인의 비명에 주변의 시선도 몰렸다. 놀란 마음에 B에게 뛰어갔지만 이유는 몰랐다. 흐느끼듯 울면서 떨고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이게 열려 있었어. 어떻게 이게...이게..없어. 다 없어"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 주저 앉는 B가 하염없이 되뇄다.
'손이 눈보다 빨랐던 거다. 그래도 내가 좀 더 챙겼으면...' 내 안이함을 자책하면서도 B를 살폈다. "괜찮아. 그래도 우리가 안 다친 게 어디야. 강도 안 만난 게 어디야"라고 위로했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한 거다.
'조금 진정된 건가'. 여전히 슬픈 눈을 지우지 못하는 B.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함께 다시 살폈다. '있어야 할 게, 돈이 든 파우치, 여권, 카드 지갑.' 하지만 남은 건 여권 2개가 전부였다. 여권이 있으니 그래도 선방 아니냐고? 맞다. 다행이면 다행이다.
근데 다음날 투어를 위해 평소보다 많은 돈을 뽑았고, 커플반지이자 결혼반지가 파우치 안에 들었다는 것만 빼면 참 다행인 거다. B가 그렇게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것질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게 죄스러웠다.
희망이 있었다기보다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어 길을 나섰다. 누가 훔쳐간 게 아니라 우리가 흘리거나 어딘가에 놓고 왔길 희망하면서 우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우선 길거리 곳곳을 훑기 시작했다. 혹시 휴지통에 버려져 있을까? 안을 들여다보며 뒤지는 모습에 현지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이해한다. 꼭 하는 짓이 걸인 같았으니. 하지만 어쪄나 난 지금 찾는 게 중요한데. 날 쳐다보는 시선 따위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했다. 오물이 쌓여있는 길거리 한구석도 살폈다. 영화처럼 소매치기가 안에 든 돈만 빼내 물건은 대충 버릴까 해서다.
쉴 새 없이 걸었고 또 찾았다. 오물을 뒤지다 더러워진 손만큼 야속해 보였던 그들. 처음으로 지갑을 꺼냈던 작은 슈퍼를 찾았다. 저녁 퇴근길, 장을 보고 돌아가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던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낯선 이방인의 무례한 행동에 불쾌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미안함을 뒤로 한 채 직원들을 붙잡았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난 지금 지갑을 잃어버렸어. 이런 모양이다. 한번 찾아봐 줄 수 있니" 간절함을 담아 손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서로가 서로를 답답해 할 때쯤 우유를 품은 한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영어다.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다.
다시 차분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귀찮지 않았다. 남성은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직원이 확인을 위해 자리를 뜨자 그는 우리에게 미소를 보였다. '어디서 왔니?'라는 물음에 '한국'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안녕".
"한국 말할 줄 알아요?" 놀람과 반가움에 물었다. "주변에 한국 사람 있어요. 한국 말 공부해요. 어려워요"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수줍음이 묻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긴장감 탓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엑스(X)자를 그리는 직원. 우린 한숨을 내쉬며 출입구로 향했다. 우유를 품은 남성이 뒤를 이었다. 경찰을 찾아가겠다는 우리에게 남성이 길 안내를 제시했다. 고마움에 머리를 숙였다. 이미 날이 저물어 달이 모습을 드러낸 때다.
"저도 지난주에 소매치기 당했어요" 수도인 키예프에선 너무도 비일비재한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사과했다. "한국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 너무 미안해요"
십여분 걷다보니, 지하철역에 마련된 경찰 부스가 보였다. 남자의 설명을 들은 경찰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통보한 뒤 자리를 비웠다. 어떤 말을 했는지 사실 지금도 모른다. 행동과 뉘앙스로 파악한거지. 기다림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 남자가 돌아가면 어쩌지. 다시 온 경찰이랑 어떻게 대화하지' 수많은 상황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고맙게도 남성은 떠나지 않았다.
퇴근길 수많은 사람이 지하철역을 빠져나갔다. "너희 무슨 일이니. 왜 그렇게 슬퍼하니" 한 여성이 우리 앞에 멈춰 물었다. 젊은 여성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신부님께 고해성사하듯 우리의 얘길 전했다. 얘기가 끝나자 그 여성은 B를 살포시 안고 토닥였다.
"나 역시 너희들에게 너무 미안해. 좋은 추억을 남겨야 하는데 슬픈 기억을 준 것 같아서. 대신 사과할게." 그 여성은 우리를 달래는 한편 본인도 어제 소매치기를 당했고, 현장에서 겨우 붙잡았다고 말했다. 젊은 남성과 여성은 우크라이나의 슬픈 모습이라며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눴다.
30여분 뒤 돌아온 경찰. '안되는구나' 딱딱한 그의 얼굴과 말투에서 느꼈다. "당장 여기서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사실 찾기 어렵다. 본국에 돌아가서 보험 처리하는 게 나을거다" 경찰의 대답은 녹음기를 튼 것마냥 건조했다.
실망감에 고개를 떨궜다. 우리를 돕던 남성과 여성은 "앞날에 축복이 있길 기도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자책이라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숙소로 가는 길.
"진짜 손이 눈보다 빨라...소매치기가 아니라 타자같아. 그래도 여권은 두고 갔네. 이놈들 최소한 양심은 있네...한국 가야했는데 여권 없었으면 엄청 큰일이지. 우린 운이 좋은거야" 신소리를 내뱉었다. 우린 지쳤지만 조금 더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