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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지 Jan 18. 2022

네 맘대로 남자와 내 맘대로 여자

Yongkang st. YABU cafe

이 이야기들은 실제로 있는 장소, 혹은 실제로 있었던 장소를 차용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隨便你。 ——네 마음대로 해


타이베이 융캉제의 야부카페에는 독특한 메뉴가 있다.


‘네 마음대로’ -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음료를 커스텀 해드립니다.
‘내 마음대로’ - 바리스타 마음대로 음료를 제조해 드립니다.


지아쥔과 아쉬엔은 일요일 늦은 오후면 종종 야부카페를 찾았다.


융캉제에서 조금 비껴 난 골목에, 유명한 식당과 기념품샵만을 급하게 들렀다 돌아가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미처 닫지 않는 카페들 사이, 그곳에 야부카페가 있다.


관광객들이 붐비는 번잡한 메인 스트릿에서 돌연 한가 해지는 골목을 따라 단골 카페를 찾아 들어가는 그 짧은 여정을 아쉬엔은 좋아한다.

지아쥔과 아쉬엔은 대학교 시절부터 알게 된 사이로 벌써 7년이나 이어온 인연이다. 7년의 기간 중 5년은 연인으로, 그 5년 중 반년쯤은 헤어진 상태로,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오늘 야부카페의 바 테이블에 지아쥔 이 남자와 나란히 앉아 아쉬엔은 또 한 번 헤어짐을 생각하는 것이다.


隨便 —— 마음대로 해. 한마디 때문에.


야부카페에 오면 아쉬엔은 어김없이 ‘손님 마음대로’를 골랐다. 내 마음대로 메뉴를 만들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별별 괴상한 시도도 몇 번 했다가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적도 있었지만 그 또한 일요일 오후, 특별할 것 없이 휴일이 끝나간다는 초조함 속에서는 나름대로 귀여운 이벤트였다.


  요즘 아쉬엔은 쌉쌀한 풍미의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에 우유,  다크 초코시럽과 민트 시럽을 섞고 자잘한 얼음조각이 서그럭하게 담긴 민트 모카로 '마음대로'를 주문하곤 한다.


여러 개성 넘치는 시도 끝에 찾은 가장 마음에 드는 조합이었다. 그리고 야부카페의 바리스타들은 하나 같이 초코시럽을 넣어 달라면서도 또  달아서는 안된다는 아쉬엔의 까다로운 주문을 존중해줬다.


"정말 맛있는데, 정식 메뉴로 올릴 생각은 없어요?"

"이 까다로운 주문을 하는 손님은 너 하나로 충분하거든!"

어느덧 단골이 되어 친해진 카페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쉬엔의 제안을 거절했다.   

「까다로운」 아쉬엔은 그 말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내가 그렇게 까다로워?’

‘네가 그렇다기보다는, 니 취향이 까다로운 편이지. 좋은 거야.’


지아쥔은 늘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반면에 지아쥔은 늘 무던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어느 카페를 가든, 메뉴판을 한 번 훑고는

"그럼 나는.... 아메리카노."


항상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처음엔 그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지아쥔에게는 취향이랄 게 딱히 없어 보였다. 매번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것도 우유가 싫어서라던가 원두 맛에 집중하고 싶다거나 담백한 맛이 좋다던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실 커피를 좋아하기는 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아메리카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또?"

"음... 그럼 오늘은 바리스타 마음대로."


늘 이런 식이다.

그리고는 바리스타가 마음대로 내놓은 실험적인 메뉴도,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오늘의 추천 메뉴도, 그게 뭐든 지아쥔은 '나쁘지 않네'라며 마셨다.


아메리카노가 아니면 '바리스타 마음대로', 그게 아니면 '네 마음대로.'

휴가지를 고를 때에도, 식당을 고를 때에도 그의 선택은 아쉬엔이 좋은 대로였다. 사람들은 그게 뭐가 나쁜 거냐고 아쉬엔을 배부른 소리 하는 여자로 취급하며 심지어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네 마음대로'라는 말이 아쉬엔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음… 그럼 오늘은 바리스타 마음대로.'


그래서 오늘 그 말을 들으면서 아쉬엔은 또 한 번 헤어짐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 남자는 취향이라는 게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그의 여자 취향도 모르겠다. 여자 취향이라는 게 있기는 했던 걸까 싶다.

숫기 없이 우물거리던 그가 귀엽고 답답해서 냅다 먼저 키스해버린 아쉬엔을 두고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쁘지 않네.'라고.

 그가 매번 주문하는 아메리카노처럼,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뭐 나쁘지 않으니까 사귀게 된 거라고.


오늘의 바리스타 추천 메뉴는 오렌지 크림 커피다.


"나쁘지 않네."

라며 말린 오렌지 한 조각이 얹어진 커피를 홀짝 마시는 그를 바라보기가 서글퍼진다.

 

아쉬엔은 자신의 민트모카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지만 쓰고, 쌉쌀한 맛과 함께인 민트향은 신선하기보다는 가슴을 허하게 만든다.



야부카페는 짙은 초록색 벽이 매력적인 곳이다. 거기에 붉은 오렌지색 소품들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분위기를 완성한다.  반대의 색깔이 토록 멋지게 어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아쉬엔도 한때는 자신과 지아쥔이 그러하다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정하고 따뜻한 지아쥔이 투명한 얼음 조각 같다. 분명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면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쉬엔은 가끔 자신이 그가 별생각 없이 주문하는 아메리카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지아쥔이 어느 날 사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밀크티였구나라고 깨닫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가 어느 날 아쉬엔에게 맞춰진 모든 취향과 선택이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봐

그 7년 동안 줄곧 너는 내가 진정 원하던 사람이 아니었어라는 사실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올까 봐,

그래서 함께한 그 7년의 시간이 허망해질까 봐.

만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두려움이 아쉬엔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아쉬엔은 그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다

그에게 헤어짐을 고하고는 했다.


지아쥔은 처음에는 놀라는 듯했다가 두 번, 세 번쯤 반복되자 이제는 그마저도 무덤덤해지는 것 같았다.

헤어지자고 해놓고 그때마다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쉬엔이었다.

지아쥔은 헤어짐 앞에 불쌍한 강아지 같은 얼굴은 했어도 딱히 매달리거나 붙잡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쉬엔은 보고 싶은 마음을 못 누르고 얼마 못 가서 지아쥔을 다시 불러내 끌어안으면서도 또다시 불안해지는 것이다. 무던한 그가, 헤어져 보니 굳이 아쉬엔이 아니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까 봐.


"내가 왜 좋아?

날 왜 좋아하는지, 좋아하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어. "


지아쥔은 그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아쉬엔이 좋아하는 꽃은 하얀 장미이다. 하얀 장미에게서는 괜히 더 청초하고 맑은 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했다. 11월 중순쯤, 누그러진 타이베이의 햇살 속에 찬 바람이 조금씩 섞여 불어오기 시작하는 그 시기의 청량한 날씨를 가장 좋아한다. 그때쯤엔 늘 오래 걸을 수 있는 풍경이 좋은 산책로를 생각해둬야 한다. 너무 달아서 가끔 머리가 아픈 것 같다면서도 리치 맛이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정작 리치 제철이 되면 생과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한 여름에는 아주 아주 차가운 파인애플 맥주에 돈까스 먹는 것을 좋아한다. 해야 할 일이 밀려 날카로워져 있을 때에는 다크 초콜릿을 준비해둬야 한다. 쌉쌀한 맛이 강할수록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다. 모처럼 일찍 눈이 떠진 휴일 아침이라면 중산역의 멜란지 커피숍을,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초조해져 버린 일요일 오후에는 관광객이 빠져나간 융캉제 골목을 거닐다 야부카페에 들리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아쉬엔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하라면 하루 종일도 말할 수 있다.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뭘까. 지아쥔은 몇 번이고 그렇게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건 뭔데!!' 라면서 더 슬픈 표정을 지을 그녀라는 것도 지아쥔은 잘 알고 있다.


아쉬엔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새로운 메뉴, 새로운 패션 스타일, 새로 발견한 가게, 새로운 음악... 오랜 관찰 결과 그 온갖 새로운 것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제법 확고한 아쉬엔의 취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꼭 주기적으로 찾는 가게, 그래도 다시 즐겨 듣게 되고야 마는 음악… 등 등, 지아쥔은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마다 들뜬 아쉬엔을 보며 가끔 그녀의 가장 확고한 취향에 자신이 있기를 기도하고는 했지만...


"그만 하자."


벌써 네 번째.

그녀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자신은 늘 어딘가 부족한 것만 같다.  


"또 헤어졌어?"

지아쥔의 안색을 보고 같은 사무실의 쓰윈이 물었다.

지아쥔은 어색하게 웃었고, 쓰윈은 그래 봐야 다시 만날 거라고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지아쥔이 작업중이던 디자인 출력본을 던져줬다. 이번에 의뢰 받은 에세이집의 표지 디자인이다.


所有上癮的都是苦的。(중독되는 모든 것들은 쓴맛이다.)

표지 한쪽에 적힌 홍보용 글귀를 멍하니 쳐다보며 지아쥔은 술과 담배, 커피, 그리고 아쉬엔이 좋아하는 다크 초콜릿을 떠올렸다. 달콤하지 않더라도 늘 찾게 되는 것들. 어떤 커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렌지 향이 나든, 위스키 맛이 나든, 그녀와 함께하는 커피면 그걸로 됐다.

  



이번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헤어진 지 세 달이 넘어가도록 지아쥔은 집안에 남겨진 아쉬엔의 물건들을 치우지 못했다.

그녀가 쓰던 컵, 칫솔, 잠옷... 화장대에는 그녀의 화장품이 그대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현관 신발장 안에는 그녀의 우산과, 운동화가 있다. 아침 저녁마다 지아쥔은 그것들을 마주치면서도 차마 치우지는 못했다.


태연하게 잘 지냈냐며 웃어 보이려다가 실패하고 와락 안겨 훌쩍이는 아쉬엔을 다시 품에 안고서야 지아쥔은 오랜만에 웃었다. 세 달만에 지아쥔의 집에 들어선 아쉬엔은 수건을 꺼내려 욕실 수납장을 열었다가 안에 놓인 노란색 칫솔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훌쩍이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지아쥔은 칫솔을 든 채 눈이 빨개진 아쉬엔을 보고 꽤 사랑스럽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버리길 잘했지? 어떻게 버리냐."


지아쥔은 여전히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맘대로 하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쉬엔은 더 이상 자신이 그에게 '나쁘지 않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의 방식일 뿐임을 안다. 그리고 얼마 뒤, 지아쥔은 아쉬엔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아쉬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먹임이 섞인 미소로


"随便你(네 맘대로 해)"라고 대답하며 지아쥔을 놀렸다.


청첩장 디자인은 당연하게도 지아쥔이 맡았다. 지아쥔은 함께 나란히 찍은 사진에 둘의 변함없이 함께할 미래를 적었다. 신랑의 사진 아래에는 随便你(네 맘대로)를, 신부의 사진 아래에는 随便我(내 맘대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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