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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형 Dec 04. 2022

얼콰해져 아름다운 밤

강릉시 주문진항에서 강릉시내

동해바다 도보여행길인 해파랑길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한 달에 2-3일씩 나눠서 여행하고 있습니다. '해파랑 일기'라는 제목으로 도보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18일~19일 흐림


           연차를 낸 금요일 늦은 오후 KTX를 타고 강릉으로 왔다. 병원에 입원하셨던 어머니를 퇴원시켜 드리고 도보여행을 위해 기차를 탔다. 강릉 강문해변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왔다.  라면가게지만 소위 인스타 감성이 가득한 곳이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아 혼자 식사와 반주를 즐기며 상념에 빠지기는 그만이다.

강릉 강문해변 선호라면

          공동연차로 모두 쉬는 날 아침 톡이 날아든다. 상사의 톡이다. '월요일 긴급보고사항 준비 요망' 톡에 미안함이 묻어난다. 후배의 톡도 더한다. '월요일 아침 일찍 발주처 보고 관련 사항' 내 일이 아니고 선배 일이라는 건조함이 함께 느껴진다. 오전에 퇴원하신 어머니는 무척이나 우울하고 힘들어 하셨다. 무릎 연골 시술로 휠체어를 타셔야 했고, 청력이 떨어지셔서 보청기가 필요하시게 되었다. 편찮으신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가끔의 괴팍함에 대한 도리 없음은 체념에 가까운 탄식으로 느껴진다. 엄마는 평생 강한 여장부셨다. 최소한 겉으로는 우울함과는 거리가 먼 씩씩하신 분이시만, 최근 들어서 기력 없음과 함께 우울함을 호소하신다. 요즘은 주위에 한 숨 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아프다. 같이 일하는 동료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힘들어 보인다. 내 마음이 힘들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지만, 우울함은 몇 년째 우리를 괴롭히는 전염병인 양, 소리 없이 주변에 번져가는 듯하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아내는 내 푸념에 본인보다 두배는 큰 남자를 안아주며 '여행 가서 모두 털어버리고 힐링하고 돌아와. 괜찮을 거야'라며 위로해 준다. 고기국수에 소주를 반 병쯤 비우고, 초저녁 불 켜진 바닷가 카페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펼쳐보지만, 보이는 것은 그리운 삶의 자유가 아니라 반주에 얼콰해져서 부옇게 보이는 활자뿐이다. 아름다운 밤이다.


          토요일 이른 아침 주문진항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여전히 흐린 날씨다. 완벽한 일출은 오늘도 보기 힘들듯 하지만 구름과 어우러진 때 늦은 태양의 등장은 일출 못지않게 아름답다. 혼자 있는 아침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성시경의 노래로 귀를 틀어막고 음악소리에 발걸음을 맞추어 천천히 아침 태양의 등장을 즐긴다. 떠오르는 태양과 걸음에 집중하면 어느새 성시경의 음악도 어제의 상념들도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아침 길과 나만 남아있다. 나는 이른 아침 혼자만의 산책이 좋다. 오늘은 특히 구름 사이 태양과 성시경, 주문진의 오징어 틀이 어우러져 내 산책은 더욱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된다.


          주문진항과 해변을 지나, 속도를 높여본다. 이번 여행은 이틀 여정으로 왔기 때문에 부지런히 걷고 있다. 사천진항을 거쳐 경포해송길이다. 해송으로 가득한 바닷가 숲 길을 걷는 아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힐링, 그 자체이다. 힐링 숲을 지나 강릉 순긋해변의 어느 갈래길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갈래길의 표지판은 'ㅇㅇ 대학교 강릉연수원'이라고 가리킵니다. 걸음을 멈추고 한 동안 표지판과 순긋해변을 번갈아 쳐다보며 20살 시절로 돌아갑니다. 1990년 서울 모 대학 방송기자였던 나는 여름이 되면 학교 연수원에 MT를 오곤 했었다. 학교 버스로 이동했고, 젊음과 술에 반쯤은 취해 있었던 시기라 연수원이 있었던 곳이 이곳 순긋해변이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호기롭게 들어서 바다에 빠뜨리며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던 그곳이 이 해변이었다니... 해변을 뛰어다니는 젊은 대학생들의 모습이 오래된 영상처럼 해변에 투영되고 나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오랫동안 서서 감상합니다. 청바지에 흰 티, 더벅머리에 잠자리 안경. 촌스럽지만 열정과 패기로 가득한 맑은 눈을 가진 젊은 친구들의 모습이 영상 속에 비칩니다. 우연찮게도 며칠 전 오랜만에 이 해변에서 시간을 같이 했던 선후배들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머리에는 허옇게 서리가 내리고 배가 튀어나온 중년의 모습으로 세상 짐을 다진 듯 푸념하다가도 옛날이야기가 나오면 수다쟁이가 되어 그때의 눈빛을 찾는 추억팔이 아저씨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에 작은 꿈을 품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추억의 다큐를 뒤로 하고 순긋해변을 지나갑니다.


          카페인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커피를 좋아해서 강릉 커피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많은 인파와 번잡스러움에 밀려 지나쳤다. 커피거리는 강릉 순목해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해변에 자판기가 몇 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맛이 별스럽게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유명한 바리스타들이 카페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커피거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실, 자판기 커피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나... 아마도 자판기 커피 맛은 아름답고 조용한 순목해변의 맛이 아닐까? 커피 맛의 절반은 주변 환경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커피로 유명한 순목해변을 지나 작은 항의 매점에서 파는 1000원짜리 커피를 들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데크에 앉아 커피를 즐긴다.


           강릉시내까지 들어와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시내의 게스트하우스에 자리를 잡고 샤워를 한 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 근처를 검색해 보니, 강릉 중앙시장이 나온다. 강릉이나 속초의 재래시장은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다. 정신없는 저녁식사가 싫어서 중앙시장 뒷골목의 순대골목에서 손님이 적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여행을 하면서 저녁식사로 반주하는 것에 맛을 들여서 백반이나 국밥을 주문하고 소주를 적당히 마신다. 오늘처럼 쌀쌀한 늦가을 저녁, 따뜻한 국밥과 소주 한 잔은 추위에 긴장한 몸과 마음을 노근 노곤 하게 만들어 준다. 여행의 피곤함과 한 잔 술의 얼콰함이 섞여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하다. 기분 좋은 몽롱함으로 강릉의 거리를 걸어 자리끼로 쓸 생수 한 병을 사들고 숙소로 들어간다. 오늘도 강릉의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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