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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Sep 11. 2022

고양이 멸치 주는 할아버지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오랜만에 엄마 아빠의 집에 방문했다. 아빠 생신이라고 한 번 얼굴이라도 비추라고 사정사정해서 발걸음을 뗐다. 집에는 명절 때 한 번 갔으니, 6개월 만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사실 엄마 아빠는 지금도 가난하다. 한평생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살아오신 부모님의 살림살이는 대부분 허름한 중고제품이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탄 중고제품에서 나오는 그 가난의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햇볕이 따가워 양산을 써도 살짝 어지러울 정도의 더운 날이었다. 시 외곽에 위치한 부모님의 임대아파트의 대문을 여니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덥 디더운 꼭대기 층에서 집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놓고 여름을 지내고 계셨다. 가방을 풀고 땀에 젖은 등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들어와서 말했다.


“에어컨 있잖나. 작년에 고장이 났는데, 사람이 와서 못 고치겠다 하고 갔다. 어찌하면 좋노.” 했다.


듣자 하니 이번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 아빠가 어디선가 사온 싸구려 중고 에어컨이 고장이 난 것이었다. 비싼 제품도 아니고, 오래된 제품이다 보니 수리하러 온 사람도 새로 사라고 하고 가버린 듯했다. 우리 집은 새 에어컨을 살 돈이 없으니, 없는 채로 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언니 모두 잠을 잘 수 없는 더위에 새벽에 몇 번이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다시 잠들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아직 이 사람들이 덜 더워서 이렇게 사는구나. 싶었다. 몇십 년을 이렇게 밖에 못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너무 괘씸했다.


다음날 아침, 아빠가 갑자기 같이 등산을 가자고 했다. 고혈압, 당뇨가 온 아빠는 요즘 밤에 일용직으로 일을 나가고 새벽에 들어와 한 숨 자고 날이 뜨겁지 않은 아침에 잠깐 등산을 다녀온다고 했다. 집안도 후끈후끈한데 등산을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집에 와서 잘 먹은 김에 운동하면 좋겠다 싶어 간다고 했다.


등산 가기 전에 아빠가 주섬주섬 냉장고에서 이것저것을 꺼내고 계셨다. 냉동실 문을 여시길래 '물을 챙기나 보다. 날이 덥긴 하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집을 나섰다. 17년이 넘은 또 어디선가 얻어온 차를 타고 도착한 등산로 입구에서 아빠는 잠깐 기다려 보라고 했다. '왜??'라고 물어보니 아빠의 대답은 기절초풍할만했다.


"여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밥을 챙기야 한다."



아빠 차 엔진 소리가 꺼지자마자 멀리서 애옹애옹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맛있는 걸 잘 얻어먹었는지 때깔이 고와 보이는 고양이가 능청능청 걸어왔다.


아빠는 냉동실에서 물 대신 꺼내온 육수용 말린 멸치를 고양이에게 한 줌 내줬다. 이 녀석은 익숙한 듯 맛있게 멸치를 먹었다.

"고양이 멸치도 줘?" 하고 물어보니 아빠는

"가끔가다 엄마 몰래 디포리도 준다." 고 했다.

"그래도 밥을 쪼매씩 주니까 아가 때깔이 좋아졌다."며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나의 유년시절은 색채가 부족한 회색빛이었다.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 다녔고, 문제집 살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보충 교재를 사라고 할 때가 가장 공포스러웠던 나의 어린날은 재화의 부족함으로 인해 많은 것이 부족했다. 몸이 가난하자 마음도 가난했던 우리 식구들은 서로를 미워했고, 나는 그중 아빠가 제일 싫었다.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매일 술만 마셨고, 식구들을 때렸고, 항상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런 아빠가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생명체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이를 먹고 사람이 바뀌었구나. 내 기억 속의 아빠는 괴물 같은 사람이었는데, 고양이 멸치 챙겨주는 귀여운 할아버지가 됐구나 싶었다. 이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과거의 아빠를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 마음을 열어주고 싶은 의사도 없다. 그냥 혈연으로 묶여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말랑말랑해진 아빠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지금의 고양이 멸치 주는 귀여운 할아버지까지 굳이 미워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니 등산로 입구에 커피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커피 파는 아주머니는 아빠가 익숙하다는 듯이 인사를 하셨고, 아빠는 작은 딸이라며 나를 소개했다. "아이고 아빠랑 딸이랑 똑같아예!! 너무 좋으시겠으예!!" 하시는 아주머니의 말에 아빠는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냉수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 앉아 회사 근처에 있는 가전제품 상가에 전화를 걸었다. 멀리 있는 본가에 에어컨을 설치해주고 싶다고, 가능하냐고 물어봤다. 주말이 지나면 방문해서 견적을 받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못해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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