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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Jun 04. 2024

우울증 약을 5년이나 먹었는데

왜 안나을까

내 인생의 첫 기억은, 우는 나를 깜깜한 장농속 이불사이에 던져 넣으며 문을 닫는 화난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의 우울감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두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꽃이 일렁거리는 가스보일러를 보면서 터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이윽고 모두를 죽여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만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까만 비닐봉지에 얼굴을 넣어보기도 했고, 집으로 가는 길 울타리에 목을 대보기도 했고, 옷걸이를 늘려 목을 달아보고자 했다. 이 모든 건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견디기엔 겁이 많았고, 삶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불행했다. 내 삶에는 빛이 들어올 구멍이 없는 듯했다.


사춘기가 지나고 성인이 되고 나니, 내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정도의 우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정도의 가난과 불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던 남자친구와는 참 많이 싸웠다. 같이 겨울에 놀러 갔던 군산에서 에일 듯이 부는 겨울 바다 바람을 맞고선 실내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가, 기껏 놀러 온 곳에서 이 정도를 못 참느냐고 화를 냈다. 핫팩도 줬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나는 화난 사람을 보면 눈물부터 났었다. 그래서 서글프게 울고, 눈물이 얼어붙은 얼굴은 더욱 차가웠다. 


그러고 며칠 지나서 그 친구의 패딩을 빌려 입을 일이 있었다. 패딩을 입고 깜짝 놀랐다. 내가 가진 그 어떤 옷들보다도 걔가 여러 벌 가지고 있었던 패딩 중 하나가 더 따뜻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따뜻하게 지내는구나. 저소득층이어서 들어갈 수 있었던 6인용 기숙사에선 내가 울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샤워실에서 한참을 샤워하면서 울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적도 없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살아본 적도 없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인생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렸다. 나는 마음조차 가난해서 바람이 드나드는 마음 한편에 따뜻한 옷 한 벌 입히지 못했다.


그래서 병원에 갔다.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심리상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는 전문의에게 나를 털어놓는 것 자체가 나에겐 참 위로가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제 일을 하지 못했던 세로토닌 수용체를 일하게 만드는 약을 먹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도 먹고, 잠을 푹 잘 수 있게 하는 약도 먹었다. 


15킬로가 넘게 빠졌던 살이 다시 쪘고, 취직도 했다. 운동도 했고, 공부도 했고,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지만 나는 여전히 죽고 싶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얼마 전이었나, 남자친구가 나한테 말했다.

"약은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거야? 괜찮아졌으면 좋겠는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치료를 5년째 받고 있었지만, 나는 항우울제를 먹어도 무기력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게 뭐? 돈을 벌고 돈을 모으면 그게 뭐?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관계를 쌓으면 그게 뭐? 무언가 성취하고 이루어내면 그게 뭐? 아등바등 살아온 거 같은데, 손아귀에 남는 게 얼마 없는 내 삶은 여전히 싫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행복한 게 뭔지 알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고, 삶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나는 증세가 조금 안정된 약만 꼬박꼬박 타오던 병원 대신 다른 병원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의사 선생님께선 나에게 말씀하셨다.

혹시 다른 병원에서 조울증이라고 하시지 않던가요?


이 사람은 점쟁이가 분명했다. 나는 항상 병원에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거나, 과소비를 했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는지 질문을 받았다. 조증삽화가 있는지 체크하시는 듯했다. 나는 항상 은은하게 기분이 좋지 않은데, 그렇게 자신감 넘쳤던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나의 진단에는 항상 조울증이 끼여있었다.


이건 우울증이라기보다는, 트라우마예요.
트라우마는 후천적으로 신경계를 망가뜨려요. 지속적인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인해서 항우울제는 보존적인 치료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되고 지속되어 온 트라우마는 조울증이랑 비슷해 보일 수 있어요.



나의 진단은 1순위가 PTSD, 그리고 2순위가 우울증이었다. 나에겐 항우울제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갈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유아시절의 트라우마를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사랑으로 극복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하셨다.


위기감을 느꼈던 나의 어린 시절 뇌는 불안한 환경과 주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행복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부분을 잘라내 왔다. 그런 내가 속마음을 터놓고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겨우 두 번째지만, 안정된 연인 관계에서도 가난한 부모님은 결혼의 장애물이 되었고, 만약 이를 무릅쓰고 가정을 꾸려봤자 늙고 병든 무일푼의 엄마아빠는 내가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데에 또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약점 투성이인 나는 항상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하다는 유명한 밈이 생각난다. 나는 사랑의 멋짐을 몰라 아직도 슬퍼하고 있다. 5년 동안 항우울제를 열심히 먹었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로토닌 수용체의 작용보다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욕심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사랑받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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