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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Dec 14. 2023

3,000만 원 썼는데 30만 원 보태준 너

"선생님 내년에는 아무래도 기숙사 입주 연장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올해가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요?"


회사에서 갑자기 방을 빼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내에 구비되어 있었던 1인실 기숙사에서 호위호식하며 지냈는데, 뒤에 들어올 사람이 생겼다며 방을 빼달라고 하셨다.


사내에 위치해서 안전할 뿐만 아니라 저렴하고, 쓰레기 걱정, 냉난방 걱정 없이 한 달에 단돈 15만 원에 지낼 수 있었던 좋은 곳이었는데, 나가라고 하셨다. 가뜩이나 매일 12시쯤에 집에 기어들어와서 머리만 뉘이고 자는데 갑자기 이사까지 하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허허벌판에 큼직한 공장들만 덩그러니 있는 읍단위 소도시는 인프라에 비해서 젊은 사람들이 많고, 때문에 원룸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귀신이든 바퀴벌레든 뭔가 나올 것처럼 생겼는데 달에 45만 원을 달라고 했다. 아파트 내에 위치한 오피스텔은 월세만 60만 원을 넘게 불렀다. 이러다간 월급의 반절이 주거 관련 비용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머리만 뉘이고 자면 되지만, 천장이 너무 낮아 평균 키보다 작은 내가 팔을 뻗으면 천장에 손이 닿을 거 같은 원룸 건물을 보고 있자니 조금 우울했다. 나는 어렸을 때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거실에서 잤고, 내 책상을 온전히 쓰는 건 학교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기숙사 생활에, 고시원 생활을 했었다. 그에 반해서 지금 사용하는 회사 기숙사는 궁궐 같은 곳이었는데 나가야 한다니 우울했다. 내 능력이 부족한 건지, 우리나라 부동산이 잘못된 건지 헷갈렸다.


그렇게 회사 다용도실에서 몰래 살기로 결심을 해야 하나 걱정하며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린 결과는, 바로 아파트로의 이사였다. 주변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서 전세자금 대출을 받고 이자를 갚는 것이 제일 저렴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계약금을 내고, 대출을 받고, 잔금을 치르고 들어간 낡은 23평짜리 아파트. 내 공간이 생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일까 나는 계속 걱정을 했다. 가구는 어떻게 하지, 가전은 어떻게 하지, 이사는 어떻게 해야 하지 끊임없는 걱정을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2,000만 원이 넘는 돈이 보증금으로 묶여버렸는데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이 계속 생겼다. 사람을 불러다 청소도 해야 했고, 기본적인 침대나 식탁은 구입을 해야만 했고, 에어컨이나 가스레인지 같은 가전기기도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알거지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본가에 언니가 자취방에서 쓰던 가전이 있어 용달을 불러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하셨던 말은


돈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였다. 본가 식구들도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내후년에 분양 전환 될 때 돈을 좀 보태줬으면 한다고 하셨다. 내 코도 석자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기에 며칠 뒤 카톡이 왔다. 이사 다 하고 나면 너네 집에 놀러 가겠다 했다.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놀러 오겠다니, 바쁘니까 놀러올거면 오지 마시라고 말한 뒤 제발이 저렸는지 심장이 쿵쾅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녁엔 계속 일을 해야 하니까 평일 점심시간에 작은 세단에 많지 않은 짐을 실어다 옮겨놓곤 했다. 맨몸이 닿이는 가구들은 될 수 있으면 저렴한 제품으로 새로 구입했고, 식탁이나 선반 같은 것들은 중고로 구입했다. 회사에 근무하시는 청소 이모님들께서 불편하시면 안 되니 쓰레기도 나누어서 조금씩 정리했다.


여러 군데 관심을 쏟으려니 신경이 예민해졌다. 연말이라 일도 많이 들어오는데 이사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무언가 결정 하는것도 힘든 일이었고, 결정하고 나서도 너무 힘들었다. 근무하느라 바빠 죽을 것 같은 와중에 가구 기사님께도 전화가 오고, 도배 사장님에게도 전화가 오고, 은행에서도 전화가 왔다. 그분들도 돈 벌고 일하려고 그러시는 거니까, 나도 힘든 티를 내선 안 됐다.


도와줄만한 남자친구는 너무 멀리 있었고, 너무 바빴다. 며칠 동안 저녁에 잘 자라, 아침에 일어났냐 소리만 반복할 정도로 너무 바빴다. 이렇게 아파트라도 한채 전세로 산다면 혹시나 우리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식탁도 4인용으로 사고, 침대도 큰 걸로, 베개는 4개나 샀다. 그런데 해당 당사자가 바빠서 아무 신경도 안 써주는 듯 하니 내심 섭섭했다.


그래도 내 집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는 게 맞고, 남자친구는 알아서 잘 지내다가 본인이 나랑 같이 지내고 싶은 때가 온다면 그때 알아서 해야 했다. 부모님 집에서 도착한 가전을 옮겨주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고마워해야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계속 생각이 뾰족해졌다. 가슴이 쿵쿵거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모난 마음에 사포질을 해야 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힘들고 막막한데 빈털터리가 된 기분에 눈물이 조금씩 흐르던 어느 날 밤, 남자친구가 갑자기 돈을 송금했다. 30만 원이었다. 새 집에서는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고생 많다고 했다. 역시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인 걸까 싶어서 눈물이 더 나왔다. 우리의 한 달 월급은 고만고만하다. 고만고만한 월급 같이 받으면서, 이틀은 일해야 받는 돈을 선뜻 내준 것이 고마웠다.

4년 가까이 만나면서 서로에게 30만 원이 훌쩍 넘는 선물도 주고받았다. 휴대폰, 노트북, 그리고 좋은 곳으로 가는 여행 등등... 그런데 받고 눈물이 덜컥 나온 건 다름 아닌 현금 30만 원이었다.


요즘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사 관련한 비용을 엑셀로 정리하고 있다. 전세금까지 합쳐서 벌써 2,800만 원가량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돈이 아쉬워 초봄에 구입하자 생각한 에어컨을 합치면 아무래도 3,000만 원이 훌쩍 넘을 것 같다.

와중에 수입칸에 찍힌 1%에 해당하는 30만 원이 괜히 귀엽고 소중했다. 지금 당장 어쩔 수 없이 쓰더라도 나중에 꼭 따로 빼두어서 둘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지, 생각했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울면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막막함에 울던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생판 남인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금일봉 삼십만 원에 미래를 계획해 보는 사람이 되었다.


보태준 30만 원에는 진한 애정과, 응원이 담겨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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