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_ 일상
'날씨 탓일까?'
요즘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울적하고, 아무 일도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진다.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것을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내 증상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갱. 년. 기. 증. 상이라 나열된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나고, 웃고 싶어도 침울하다. 아이들이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시간이 온다는 것을 잘고 있다. 그 시간을 현명하게 받아들이려고 나름 준비도 열심히 했지만, 홀로 집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편이 헛헛해지고 서운하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쁜 시간을 쪼개 공부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익숙해진 삶이라 진정으로 나를 위한 여유 시간을 갖는 것이 낯설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지혜롭게 받아들이겠다고 멋진 척하며 말하지만 본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마음으로 자가방어만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중년 여자들의 삶에 대해서도 고민해 본다.
내가 어릴 적에 확신에 차서 했던 말들.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당당하게 살아야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어야지, 저게 뭐야. 무능하게 집에만 있고.”
“왜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거야?” 등등.
엄마로서의 삶을 살기 전까지 내가 속으로 읊었던 말들이었다.
나는 결혼하지 않고 커리어우먼으로 멋지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고 위풍당당하게 그런 생각들을 했지만, 결혼이라는 것을 선택 후 육아를 하게 되면서부터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인생의 흐름과 순리를 거슬러 다른 선택을 할 만한 용기가 다시 생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순응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이 삶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면 자꾸 과거에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요즘 중. 고등학교부터 써왔던 일기를 꺼내본다.
그곳엔 엄마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와 같은 46살의 엄마.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모여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간, 유독 슬픈 장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눈물을 펑펑 흘리곤 했다. 어느 날은 드라마를 보면서 빨래를 개다가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모습도 보았다.
"엄마 왜 울어?"라고 묻지 않았다.
그 드라마가 엄마에게 슬펐나 보다고 생각만 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 엄마는 자신의 쌍꺼풀이 퉁퉁 부은 줄도 모르고 "요즘 드라마를 너무 실감 나게 잘 만들었네."라고 했다.
그때는 몰랐던 엄마의 울음. 그 의미를 지금 생각해 본다.
지금의 겪고 있는 내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믿어본다. 본인도 울고 싶지 않은데, 아무 일도 없는데 눈물이 그냥 나오는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갱년기라는 증상이 그 시절에는 화병이나 우울증으로 치부되었고, 성격이 예민한 사람들이 잘 걸리는 것 그저 팔자가 좋아서 생기는 병이라고 치부되는 시대였기에 엄마는 더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갱년기 증상은 몸이 아프지만 검사를 하면 아무 증상이 없다고 하니,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아프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내 고통은 사실이지만 그저 혼자만 알아야만 하는 슬픔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야 조금 인정받는 병이지만 화병으로 여겨지는 이 증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기도 어렵고, 자칫하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람으로 치부될까 싶은 두려움이 가득하니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싶어 진다.
운전을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장을 보다가 눈물이 갑자기 쏟아진다. 가끔 방안에 들어가서 펑펑 울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 혹시 아이들이 당황할까 싶어 내 눈물을 감춘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며 지루한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장면 자체가 오열할 내용이 아니었는데도 흐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딸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딸에게 대답했다.
“드라마 내용이 너무 슬퍼. 주인공이 진짜 멋지잖아.”
“뭔 소리야. 주인공이 멋진데 왜 엄마가 슬퍼하냐고?”
“멋지니까... 나도 멋지게 되고 싶어.”
“아니야. 엄마는 진짜 멋진 사람이야. 엄마가 그걸 왜 모르냐."
"........"
"그리고 엄마!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그냥 울어! 나도 울고 싶을 때 막 그냥 울어!"
딸의 말을 듣고 내 눈물이 쏙 들어갔다. 순간 정신이 확 차려졌다.
“그니까. 내가 진짜 멋진 사람이야. 그렇지?”
요즘에 나는 누군가에게 그냥 인정받고 싶었나 보다 사랑받고 싶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 콧물을 훌쩍 들이켰다. 딸의 한 마디에 감정이 복받쳐, 나의 엄마가 드라마를 보며 오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그때 엄마에게 한 번만 괜찮냐고 물어봤더라면, 엄마는 힘든 마음을 오랜 세월 숨겨가며 기나긴 고통의 터널 속에서 살지 않았지도 모르는데...
그때 내가 엄마에게 괜찮냐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라면 엄마는 정말 괜찮았을까?
머나먼 타향살이 속에서 가끔 엄마와 통화를 하다 보면 엄마의 마음은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가는 소녀처럼 험한 파도를 걷고 있는 중이라고 느껴진다.
엄마는 말할 곳이 없어서라기보다 그저 본인이 하고픈 말을 내뱉고 싶고, 그 말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것 같다. 혹여 그 말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면 서운함만이 가득하다.
오늘은 엄마의 마음이 읽혀 안쓰럽다.
그러나 엄마를 따듯하게 안아 줄 에너지가 내게 없다. 스스로를 돌 볼 에너지도 부족하다. 그저 울고 싶을 때 막 울어 버리고 싶은 소녀의 마음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기 위해서 혹은 쿨하고 멋진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서 태연한 척 버텨내지만 나는 그저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었다.
어른이 되면 울음을 울어야 하는 적당한 때를 찾는다. 당장 울고 싶지만 내일의 약속이나, 타인과 만남이 있을 때 나의 슬픔도 잠시 미뤄둔다. 아무 약속도 없거나 일정도 없는 그런 날을 잡아본다.
어른의 감정중 슬픔 감정은 늘 뒤로 미루게 된다.
슬픔 감정에서 오는 울음 앞에 맘껏 울 수 있는 적당한 때와 이유 그리고 환경을 찾는다.
나의 힘듦과 슬픈 감정들은 잠시 뒤로 미루고 살아가게 된다.
인생의 희로애락 중 '노'라는 감정은 없어도 괜찮다고 치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이처럼 그간 내가 외면했던 슬픔이란 감정이 중년의 나에게 어맘어마한 내적 고통을 안길 것이라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울고 싶을 때 용기 있게 울어도 된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용기 있는 울음이 스스로를 따듯하게 안아주는 시간 되어 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감히 확신해 본다.
이제 용기를 내어,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겠다. 이유가 없어도 괜찮다.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들, 그냥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