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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ara Apr 27. 2024

글쓰기를 통해 만난 진정한 나

성장일기 _ 일상

한 문장으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집을 읽으며 단 한 줄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여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들이 부러웠다.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쓸 때면,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씨네 21 평론을 따라 감상평을 썼다. 연극을 보고 평론가의 글을 읽고, 그들의 생각에 내 생각을 조금 덧붙여 고상하게 포장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소설을 읽고 나면 역시 평론가의 글을 꼼꼼히 읽으며 그들의 생각을 따라 하려 했고, 그들의 글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내 글은 줏대가 없었다. 따라쟁이 글쟁이였다.


나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논리적 글쓰기조차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글 쓰는 것은 수단일 뿐, 나는 그냥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유일한 장점은 글쓰기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기는 숙제로 시작된 글쓰기와 글짓기는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숙제로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을 때는 자발적으로 노트를 사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저 쓰는 행위가 좋았다. 나름 글쓰기만큼은 자신 있었던 영역이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 자신감마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오로지 글에 집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한 가지 주제를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내 글에는 구멍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글을 다시 꼼꼼히 읽으며 수정할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다. 그냥 핑계를 대본다. 


차곡차곡 모아놓은 글들을 브런치 스토리에 올리며 주변 작가들의 글을 읽어본다.  대단하다. 모두 하루 종일 글만 쓰는 전업작가들인가 싶을 정도의 글들이 가득하다.  그 글들을 보며 나는 또 작아진다. 


오래전부터 SNS에 글을 올리며 지인들로부터 "너 글 잘 쓴다"라는 말을 듣고, 진짜 글을 잘 쓰는 사람인 양 착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들이 내 글을 재밌다고 말했던 것은 내 삶의 치부들을 희화화하여 쓴 글들이었다. 내 진심만 가득했던 글에 지인들은 반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가 제한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족, 아이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았던 내게, 아이들과의 이야기가 더 이상 소재가 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본인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며 에피소드가 점점 사라졌다. 


알게 모르게 점점 포장이 되고 진심이 빠진 글들이 가득해졌다. 쓰는 나도 재미가 없으니, 읽는 사람도 재미가 없었으리라.


과거를 돌아보니 나로서 살지 않고 주변인의 시선 속에 갇혀 인생을 살아왔다. 나를 바라보는 이야기보다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희화화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내 날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자신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진심,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생각들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많이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대로였다. 


자기애가 부족한 나.


그 오랜 시간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책을 보고, 라이프 코칭도 받고, 상담도 받고, 강연도 듣고, 좋은 동영상도 수백 번 봤지만, 여전히 나를 100% 사랑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내 모든 선택을 응원하는 진짜 멋진 나는 아직 없다. 내 선택에 언제나 의구심을 품고, 누군가에게 내 생각이 어떤지 묻고 판단을 하라고 자꾸 반문한다.


여전히 내 마음 깊이 박혀 있는 거절과 거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이 무지 두렵다.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사전 조사와 검토에 지쳐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완벽하지 않으면 시도 조차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자신을 믿지 않는데 누가 나를 믿어준단 말인가?


남들이 바라보는 나는 당차고 멋진 사람이라 말해주지만, 내가 바라보는 나는 겁쟁이 쪼다이다.


이 쭈글이 겁쟁이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마도 글쓰기였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것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만큼 멋진 사람이라고 알아봐 달라고...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릴 적에 썼던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일기를 쓰는 말투가 매주 혹은 매달 달라져 있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문체가 신경숙 작가를 따라 하고 있었고, 조정래 작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조정래 작가와 닮아 있다.


여전히 나를 몰라서 방황하고 고민 중이지만 그 여정의 끝은 보이기 시작한다.


초등학생 이전의 내 모습은 어땠지? 

나는 무엇을 좋아했나?

나는 무엇을 잘했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나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계속 질문을 한다. 


내가 타고난 글쓰기 재능은 창의적인 글이 아닌 생활 밀착형 관찰일기 같은 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내 글을 멋있게 포장하고 조금 더 간지 나는 소재 찾아 글을 쓰고 싶어졌다. 

예전에 잘 쓰던 생활 밀착형 관찰일기도 못쓰게 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래서 글쓰기를 멈추고 간지 나는 조금 더 나를 멋지게 포장할 수 있는 것들도 나를 꾸미는 시간 속에 살았다. 점점 사라지는 자신감은 지켜내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어릴 적에 어른들께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고 녀석, 똘똘하게 생겼네." "말 잘한다. 아나운서 되어라." "너 나중에 엄청 잘 되겠다." "참 총명하게 생겼다."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많이 듣다 보니 진짜 똘똘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부족하고 덜렁이며 엉뚱했던 나 자신을 자꾸 똘똘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내 속마음은 ADHD였지만, 환경상 차분하게 지내야 했기에 엉덩이를 들썩이는 충동을 억누르며 자신과 싸우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엉뚱한 상상 많이 하고, 겁도 많고, 특별히 생각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아이도 아닌 호기심이 많은 소녀였다. 다만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존재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삼성출판사에서 만든 위인전과 안데르센 동화 전집을 반복해서 읽으며 나도 모르게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꿈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초중고 시절 많이 보았던 외화 시리즈 '브이'(파충류 외계인이 나타나 세상을 지배하는 미국 드라마), '소머즈', '비벌리힐즈 아이들' 등과 같은 외화를 보며 자라 온 나의 마인드는 이미 북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정, 학교, 사회에서 강요되는 관계주의, 집단주의, 가족주의는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것들을 거역할 만큼의 용기도 없이 속앓이만 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40년간을 살았으면서도 집단주의 사고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니, 나는 늘 스스로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왜 항상 불만이야?

너는 왜 순응하지 못하는 거야?

다들 그렇다고 하는데 너는 왜 아니라고 하냐고?


불만 가득했던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늘 숨기고 살아야 했기에 세상사는 것이 답답하고,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지루했다.


내 사춘기와 함께 했던 미드와 즐겨 읽던 추리소설 (아가사 크리스티)은 대부분 유럽과 북미의 작품들이 많아서 아마도 내 정체성 유럽과 북미 마인드로 세팅된 것을 아니었을까? 


여하튼 내 마음속의 엄마는 '캐서린'이었으니까. 늘 아이에게 "아유 오케이"라고 먼저 물어봐주는 어머니.


나는 두 살 차이 인 아들과 딸의 사춘기 폭주 속에서 매일 마음으로 울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과정이 이겨내면서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제대로 겪지 못했던 사춘기 때문에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오랜 시간 마음의 방황을 겪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이들의 지랄 맞은 사춘기를 응원해 본다. 


자신 제대로 알지 못해서 10대는 엉뚱함으로, 20대는 진지함과 진중함으로, 30대는 냉철함으로 나를 시시때때로 포장하며 살았다. 40대가 되어서야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서 매일매일 고군분투 중이다.


여하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머릿속은 온통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질문한다.  그래야 나의 인생이 제대로 완성될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이 노력이 한심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숙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나의 진짜 모습 중 하나는 부끄러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낯가림이 심한 내향형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가정환경상 외향형으로 살아야만 했던 소심한 소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잠시 외향형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기진맥진 쓰러져버리는 내향형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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