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가 나를 사랑하는 법
딸아이의 극심한 사춘기로 세 식구의 넋이 나갈 무렵, 작은 고양이를 입양했다. Full name인 Matilda를 줄여 Tilly라고 부르는데 어른들은 얼핏 듣고 '왜 고양이 이름을 틀니라고 붙였냐'라고 묻곤 하신다. 영 틀린 소리도 아니다. 점점 미운 짓하는 사춘기 아이를 사랑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던 우리 부부의 애정 결핍을 채우고 다시, 다르게 아이를 인정하고 아끼도록 도와준 고마운 ‘틀니’인 셈이다.
어린아이 셋, 대형견과 고양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막둥이로 태어난 틸리는 작고 여렸다. 새로 나온 새끼들을 거둘 여력이 없던 보호자가 아기 고양이들의 새 둥지를 찾았고, 한 배에서 난 세 마리 중 제일 작았던 틸리를 우리가 데려 오기로 했다. 입양을 결정하고 보호자 가정을 방문한 날, 한눈에 보기에도 겁 많은 틸리가 세살배기 그 집 막내딸의 인형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어찌나 딱하던지. 천지 분간 못하는 어린아이의 거침없는 손길에 태어나자마자 상처 받은 틸리는 소위 '무릎냥'이 아니다. 2년을 함께 산 지금도 여전히 틸리는 우리와 같이 자거나 무릎에 올라와 앉지 않는다. 가끔 딸아이 침대에서 그르릉 소리를 내며 함께 누워 자는 걸 볼 때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푸근하다. 그렇다고 트라우마의 먹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입양한 지 삼 개월 만에 중성화 수술을 하러 가서, 틸리가 비대성 심근병증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발견했다. 심장 잡음을 확인한 수의사는 수술 준비를 멈추고 학교에서 강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리도록 놀란 나는 그 후 두 시간 강의를 어떻게 마치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결국 예정된 중성화 수술 대신, 틸리를 동물 심장 전문의에게 보내 정밀 검사를 받게 했다. 진단명은 확고했다. 아직 뚜렷한 징후가 발현된 것은 아니지만 돌연사 가능성이 있고, 중성화 수술을 위한 마취와 회복과정은 틸리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우리는 중성화를 포기했다. 만 한 살이 되기 전부터 간간이 발정기를 겪는 틸리는 실내에서만 지내고 저염식의 식단 관리와 과도한 흥분을 자제하는 등 생활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 곳 뉴질랜드에서는 고양이를 실내에서만 키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혼 전 한국에서 애완견을 키워 보긴 했어도 고양이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던 나는 유튜브 영상 속의 속칭 '개냥이'들과 달리 여전히 나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고, 안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나와 늘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틸리 때문에 가벼운 짝사랑의 아픔을 견디면서 사는 중이다.
틸리의 사랑법은 섬세하고 수줍다. 멀리서 눈 깜빡이며 쳐다보거나,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 위로 올라와 한숨을 푸우 내쉬면서 눕거나, 서재에서 일을 할라치면 어슬렁거리고 다가와 내 책상 밑에 자리를 잡고 자판 두드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즐긴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바닥에 배를 깔고 함께 누워 보지만, 손을 뻗어 햇빛에 따뜻해져 꼬순내가 나는 솜털 덮인 하얀 등을 쓰다듬을라 치면 살며시 자리를 뜬다. 멀리 달아나지도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 꼬리를 말아 감고 앉아서는 어정쩡하게 책상 밑에 엎드린 나를 보며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켜 주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
내 사랑이 너무 뜨거웠나? 문득 초록, 노랑, 갈색 빛이 오묘하게 섞인 유리알 같은 틸리의 눈에 비친 내가 보인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상대를 만지고 상대의 공간을 침범하고 상대의 삶을 움직이려 하는 나 자신이 상당히 폭력적이라고 느낀다. 아픈 고양이 틸리는 나에게, 상대를 아프게 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2021.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