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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린 Jan 13. 2021

만병통치약과 비상약 사이

근거 없는 희망과 절대적인 불안의 치료

두 고양이를 함께 키우기로 결정하고 나서 내 스마트폰, 데스크톱 그리고 랩탑 모두의 웹브라우저 최근 검색어는 ‘고양이 합사’ 되시겠다. 기적처럼 쉬운 합사, 악몽 같은 최악의 합사, 끝끝내 실패했다는 지인들의 경고 등등 머릿속엔 저명한 수의사 선생님들의 지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지만 마음은 엉킨 수세미처럼 복잡하다. ‘혹시 틸리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닐지’,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다가 괜한 고생시키는 건 아닌지’, ‘이걸 내가 처음부터 왜 한다고 했나’, ‘그래도 두 녀석이 아무도 없는 긴긴 하루 동안 서로 벗이 되어주지 않을까’ 수없는 의구심과 불안 그리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희망이 뒤섞인 채, 다시 돌아온 나비와 합사 첫날을 맞았다.


틸리가 잘 안 들어가는 손님방에 나비의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틸리가 주로 생활하는 이층은 온전히 틸리의 공간으로 보호하기로 했다. 나비가 아파서 잠시 요양가기 전, 방문 너머로 경험한 낯선 고양이 체취의 기억이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처음 당하는 일인 양 당황하는 틸리. 소심하고 예민한 틸리는 닫힌 방문 저쪽에서 문 열어 달라고 낑낑대는 나비를 향해 냅다 하악질부터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틸리의 공격성에 그동안 수없는 인터넷 검색과 동영상 시청으로 다져진 합사 교육 원칙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조심스레 냄새 교환 단계를 시도했으나 천지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나비는 틸리 언니 냄새가 묻은 수건을 옆에 놓고도 천연덕스레 대변을 보는 반면, 틸리는 저만치 멀리 서서도 으르렁댄다.


합사 이틀째되는 날부터 좁은 방에 갇혀 답답한 나비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비가 있는 손님방 문 앞으로 달려가 으르렁대는 틸리를 보자니 앞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간식도 안 먹고 눈 앞에다 필사적으로 좋아하는 장난감을 흔들어도 꼼짝 앉고 눈을 부릎뜨고 으르렁대니 일층 복도가 전쟁 직전의 살벌한 무장 지대가 되었다. 이때 나의 맘을 알아챈 전지전능한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내 브라우저에 페로몬 광고를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합사 시도 전에는, 인공적으로 합성한 페로몬 제품을 권하는 유투버들을 보면서 ‘아직도 저런 약을 팔다니,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저런 훈증기 꽂아 놓는다고 고양이들이 갑자기 너그러운 보살이 되겠어?!’ 했다. (그분들께 진심 죄송하다.) 당장 내 집 복도에서 방문을 앞에 두고 살벌하게 대치한 두 고양이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신세가 되자, 고가의 훈증기 두 개와 멀티팩으로 파는 리필을 합쳐 펠리웨이 바로 구매. 아마존의 기나긴 배송기간을 원망하며 구세주 강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체통을 매일 확인한다. 드디어 도착! 갑자기 숨통이 트인다. 왜 이렇게 많이 주문했냐고 묻는 남편한테 “이건 비상약이야, 비상약. 항시 준비해야 된다고.” 이제 펠리웨이 멀티캣은 마치 떨어지면 큰일 나는 해열제나 진통제처럼 약장에 꼭 구비되어 있어야 할 우리집 비상약 목록에 올랐다. 고양이 두 마리가 나란히 찍힌 광고 사진만 봐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효과는? 아직 모르겠다. 사랑은 훈증기를 타고 모락모락 피어나길 바라지만, 틸리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보일락 말락 하는 나비에게 윗입술을 달짝 달짝 들어 올리며 하악질을 할까 말까 고민 중인 상태다. 그렇지만 복도를 지나다니는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저 작은 호리병에서 마술 같은 약기운이 나와 두 고양이를 헤어졌다가 만난 그리운 이산가족 같은 사이로 맺어주길 기대하는 희망이 생겨서일까?



과외는 불가하다던 원칙을 대폭 수정해서, 올해 초부터 딸아이가 지인분께 공부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고민 고민하다가 부탁을 드렸다. 사립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한 영광의 과거만 기억하시는 지인께서 “형수님, 걱정 마세요. 1등급 문제없습니다.” 하신다. 말씀만으로도 안심이 되어서인지, 아이의 그간 성적과 학업태도를 너무나 잘 아는 나도 과외라는 만병통치약을 믿고 싶어 졌다. 두 번 수업을 해보시고는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비상대책이 필요하겠습니다.” 아이의 현실을 짚어보시고는 비대위의 절실함을 이해하신 것 같다. 순간 부모로서 부끄러웠지만 희망을 부풀리는 만병통치약이건, 응급한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동아줄 같은 비상약이건 상관없다는 심정이 된다. 이제 숙제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는 아이가 뭘 붙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과외를 안 가겠다 미루겠다고 하는 아이와 엎치락뒤치락 실랑이가 뻔히 예상되고, ‘공부가 뭐길래’하는 회의와 자괴감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나겠지만, 만병통치약일지 비상약일지 모르는 알약을 삼켰다. 이제 마법의 시간을 기다리는 얌전한 관객이 된다.


2021.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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