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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었다.
거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눈을 떴다.
창밖의 고요함보다도,
방 안의 숨결이 먼저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스탠드 하나 아래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몰랐는데…
어떻게 당신은 나를 그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날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기억나냐고, 언제쯤 돌아올 거냐고,
그런 질문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신, 나의 오늘을 이해하려 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무슨 말은 하지 않고 삼키고 있는지—
그녀는 묻지 않고, 알아주었다.
그게 더 어렵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았다.
이른 아침,
식탁 위에는 두 잔의 따뜻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커피 마셨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웃었다.
작고 조용한 웃음이었다.
“당신이 먼저 내려줬었어요.
나는 설탕 한 스푼, 당신은 아무것도 넣지 않았죠.”
나는 컵을 들고 조용히 향을 맡았다.
묘하게 익숙한 향.
그러나 기억은 아니었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 같은 것.
입에 넣기 전부터,
아 이건 '내가 마시던 커피다' 싶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기억이 안 나도 괜찮아요.
사랑은 때로, 기억보다 먼저 오는 거니까요.”
나는 그 말이 무서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이 나를 살게 했다.
그녀는 내게 기억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지금의 나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를 몰랐지만,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지금 내 안에 아주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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