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녀는 나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by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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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나는 혼자 베란다에 섰다.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광주의 공기는 서울보다 한결 느리고 따뜻했다.

그녀는 주방에서 조용히 뭔가를 끓이고 있었고,
나는 손에 사진을 든 채, 그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 나는 분명히 행복했다.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일도, 취향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내 어깨 높이와 수면 습관,
밥을 먹을 때 어느 손을 먼저 쓰는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식탁 끝자락에 조용히 놓인
검은색 가죽 커버의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록》

첫 장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글씨였다.
정갈하고, 조심스러우며, 어딘가 간절한 문장들.


“2월 3일 – 당신이 카레는 이틀 연속 안 먹는다는 걸 알았다.”
“3월 11일 – 내가 아파서 저녁을 못 챙기자, 조용히 배달을 시켰다. 말은 없지만 다정한 사람.”
“4월 25일 – 자다가 악몽 꾸고 깬 당신이 내 손을 꼭 쥐고 잤다.”
“5월 9일 – 당신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면, 말해주세요.’
…사실 난 그게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너무 많아요.”


손끝이 저릿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그 안의 나를 처음으로 인정하고 싶어졌다.

기억은 없지만,
그녀의 기록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었다.

식탁에 앉자 그녀가 조용히 국을 내왔다.
미소국이었다.
그릇 가장자리에 파가 고르게 떠 있었고,
국물은 투명했다.

"당신, 아플 때 이거 좋아했어요. 기억 안 나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저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술 떴다.
익숙한 맛이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녹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밤이 되었다.
그녀는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눈을 감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괜찮아요. 기억 안 나도…
다시 사랑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남자.
그를 기억해주는 여자.
이 사랑은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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