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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자무 Sep 17. 2023

“사랑해야 한다.”는 그 책의 마지막 문장

<자기 앞의 생>

할 말이 있어요.

라고 그가 입을 떼는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 나라에 박사과정을 지원했고 그중에 호주와 뉴욕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한 달을 만났던 시점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는데 비자가 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나의 말에 그는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별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떨어져 있다가 여느 장거리연애같이 서서히 헤어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필 잠들기 전에 말해버린 탓에 누워있었고 나는 울기 싫어서, 또 옆에서 잠시 달래주다 금방 태연하게 잠들어버린 그의 옆에 있기 싫어서 침대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갔다.

다른 생각을 하자, 차가운 이성으로 다른 생각을 하자, 책을 읽으면 잠이 오겠지 싶어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단순히 파란 커버가 예뻐서 산 데이비드 흄의 <미학원전 시리즈>였다.

비문학 에세이를 집중해서 읽고 있는데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 위로 내가 십여 년 전쯤에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의 마지막 문장이 얹혀서 보였고, 읽혔다.


“사랑해야 한다. “라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마치 계시 같은 것처럼 내 머릿속에 박혔다.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람을 놓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 미래를 걱정하며 미리 앞서 사랑을 끝내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정했었다. 로맹가리 때문에 그렇게 결정이 쉬웠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뚝 그치고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년이 지나 나는 뉴욕에서 <자기 앞의 생>의 원서를 사러 프랑스 전문 서점을 갔다. 좋아하는 책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원서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떤 맥락에서의 문장이었을까. 그에게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다시 한번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다. 알베르틴이라는 서점에서 <La vie devant soi>를 사서 바로 앞 센트럴 파크에 앉아 문장을 확인했다.


Il faut aimer.


한국어판과 문장이 똑같았다. 그래서 앞의 맥락을 파악해 보았다. 책을 실제로 찾아보니 ‘사랑해야 한다’는 문장은 앞에 다른 긴 문장에 쉼표로 덧붙여진 문장이었다. 모모가 아끼던 우산 Arthur를 찾으러 간 라몽 아저씨에 대한 글이 있었고, 사람들은 감정적인 이유로 우산 Arthur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사랑해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우산 Arthur를 원하려면 그것을 사랑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당시 느꼈던 메시지와 달랐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그를 원하는지 스스로 의심하는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에 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도 읽혔다. 어쨌거나 나는 그 문장으로부터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을 원어로 더 명확하게 확인하니 애초에 그런 계시는 없었다는 것 같아서 마음이 텁텁했다.

나는 마지막장을 확인한 뒤에도 모자란 불어실력으로 어떻게든 뉴욕을 떠나기 전 그 책에서 또 계시를 얻어볼까 싶어 열심히 책을 읽어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여느 장거리커플처럼 우리는 헤어졌다. 그가 운을 떼는 순간 다음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나는 모든 것을 짐작했고, 그 짐작과 별 다른 내용이 아닌 내용들이 쏟아졌고, 신뢰가 무너져 더 이상은 어떤 말로도 신뢰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노력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거의 반년이 지난 뒤

이별보다는 관계의 신뢰가 무너진 것에서 온 충격에서 헤어나왔을 무렵, 가까운 지인과 서점을 탐방하다 <자기 앞의 생>이 문학동네 출간 30주년을 맞아 표지가 리뉴얼된 것을 보았다. 너무 좋은 책이라고 추천을 했고 늘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감상을 공유해 주던 지인이기에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문장의 뜻을 듣고 싶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바다로 1박 2일 여행을 간 날 우리는 복분자를 들이키며 그 문장의 뜻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도 내가 이해한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람은 사랑을 해야 한다.’라기보다는 사랑이 필요조건으로서, ‘사랑을 해야 남을 이해할 수 있고, 애정을 가져야 진정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결국 ‘사랑해야 사랑할 수 있다’는, 주정뱅이 같은 말을 주정뱅이 상태에서 하며 서로 끄덕끄덕했다.

사랑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실 이년 전 그날 밤, <자기 앞의 생> 책이 집에 있어서 마지막장을 확인하여 정확한 맥락을 파악했다고 한들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맥락 또한 그와의 사랑을 해봐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겠지. 사랑에 돌진해야 더욱더 사랑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고 믿었겠지.


이제 나는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묻는 모모보다 ‘사랑 없이 살 수 있단다.’ 하고 대답하는 아밀 아저씨에 가까워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삶으로 일 년을 채울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더 행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 삶을 더 사랑하게 된 느낌이 든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만 집중했던 시절을 지나 나는 비로소 내 삶에 집중하게 되었다. 정신이 잠시 부재한 틈을 타 피곤함이나 두려움 또한 없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스스로를 가꾸는 일도, 수년간 미뤄왔던 할 일들도 하나씩 해나갔다. 오로지 나 자신, 내 삶에 집중하면서, 기대가 되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요즘에 그 말은 또 다른 계시가 되어 다가온다.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자기 밖의 타인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 타인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도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겠지. 그를 계속 만나는 것이 나에게는 내 삶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에 결정이 그리 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너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

이건 이제 나 자신에게 되뇔 나로부터의 계시이다.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크게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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