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심'을 찾아 떠나는, 목적지는 아무도 모르는 여행의 시작
이 글은 2020년 11월 6일에 작성한 글이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3년 가까이 지난 과거가 되었다니! 오늘 브런치 작가로 데뷔(?)한 기념으로, 브런치 가입 후 처음 써보았던 글을 공유해보려 한다. (아마 이 계정에 계속 올라오게 될 나의 여러 글들의 첫 단추로도 괜찮은 것 같기도 하여 ^ㅇ^)
오늘, 나는 백수가 되었다.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있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내 발로 걸어 나온 것이다. 다음에 바로 이직할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직 사이트를 들들 뒤져 가며 이력서를 고치지도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치 속세에서 불편하게 껴 입고 있던 안 맞는 옷들을 벗어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최근에 퇴사를 앞두고,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갓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집, 우리 가족이라는 집단에 속한 것을 제외하고 돌이켜 봤을 때 내 삶에서 첫 소속은 다섯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다녔던 유치원이었다. 엄마가 깨끗하게 씻기고 예쁘게 입혀서 유치원에 보내 놓으면 선생님이 짜 놓은 프로그램대로 아이들과 함께 놀고, 밥을 먹고, 그러다 집에 가서 또 놀고, 피아노 학원을 가고, 그러다 자고 일어나면 또 비슷한 하루를 살고. 그러다 일곱 살에서 여덟 살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난생 처음 졸업 가운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고, 정들었던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러다 금세 봄이 와서 유치원과 담장 하나 두고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6년, 비슷한 동네의 중학교에 진학해 3년. 어릴 적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당시에 살고 있던 동네로부터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고 입학해서 문예창작을 배우며 3년. 그러고 나서는 붙은 대학이 하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재수를 했는데, 노량진 재수종합반에 다니며 또다시 1년. 다행히 재수의 끝에는 인서울 끝자락 학교 한 군데에 딱 붙었다. 그게 바로 내가 20대의 절반 이상을 지냈던, 29살인 지금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터닝포인트라고 생각되는 영화과에서의 시절들이었다. 분명 나는 4년제 대학을 갔는데 초등학교만큼이나 오래 다닌 뒤 스물 여섯살 여름에 겨우 졸업을 했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인턴으로 시작해서 첫 회사에서는 2년을 근무했다. 그런 뒤 곧바로 환승 이직 후 여러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이런저런 일들로 7개월을 다닌 뒤 또다시 환승 이직. 마지막이자 오늘 막 뛰쳐 나온 이 회사에서 1년 2개월.
요약하자면, 다섯 살 때 유치원에 입학했던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 나는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중간에 재수 시절이 애매하긴 하지만, 어쨌든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정해진 곳을 꾸준히 다녔으니까 뭐. 내 인생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 나니, 나는 굉장히 틀에 짜여진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 이전부터 미리 정해 놓은 규칙 속에 발을 들여서 거기에 큰 불만 없이 순응하며 살았는데, 다만 어릴 적부터 아침 잠이 많아 어디에 속하든 늦잠과 지각은 평생의 내 단짝이었다. 그 단점만 빼면 난 무리에서 늘 잘 어울렸고, 늘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리고 다행히도 어디서 뭘 하든 미움 받은 적 없이 무탈하게, 그리고 주어진 일은 제법 열심히 해 내는 그런 캐릭터였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내성적인 것 같지만 은근히 주변에 사람이 많아야 에너지가 생기고 보람을 느꼈다. 혼자 있을 때면, 특히 밤이면 온갖 잡생각과 망상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들 때문에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면 꽤나 우울해하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이 됐을 때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 가서 원래 내가 하던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무언가 원하는 일이나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혼자서 굉장히 조급해지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백수가 되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굉장히 안정감을 느끼며, 특히 학창시절에는 이다음에 어른이 됐을 때 번듯한 회사에 소속되어 안정적으로 월급을 매달 꼬박꼬박 받는 삶을 살아야지만이 성공한 어른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생각해 왔다. 남들처럼 대학교에 가고, 졸업 무렵에 정규직으로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사람들이 붐비는 도심 어딘가의 높은 빌딩에서 목에는 내 이름이 쓰여진 사원증을 걸고 회의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야근을 하고. 내가 꿈꾸던 성공적인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성공한 어른의 삶은 꽤나 달콤했다. 영화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에는 종종 돈이 너무 없어서 길에서 여러 번 울었을 정도로 힘들 때가 많았는데, 회사에 들어가 매달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고서는 어쨌든 매일 아침 9시 언저리에 출근해서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하면 꼬박꼬박 월급을 주니 아끼고 아껴서 먹고 싶은 음식도 많이 먹고, 예쁜 옷도 사 입어 보고, 주변 사람들을 축하해 줄 일이 있을 때 비싼 선물도 사서 마음을 맘껏 표현해 보고. 대학생 때는 엄두도 못 냈던 비싼 레스토랑도 가 보고, 무엇보다 연차를 아끼고 아껴서 해외 여행도 많이 다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어딘가에 속해 있는 안정적인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고 경험해 보니 늘 불안한 미래 생각에 잠못 이루던 대학생 때와 달리 자연스럽게 정서적인 안정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릴 적 꿈을 이룬 거잖아? 하지만, 강남의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나는 점점 생기를 잃어 가는 식물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을 다니며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밤을 새도 아깝지 않을 만큼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낀 적도 많았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걸 배우고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비슷한 가치관과 성격을 가진 좋은 동료들이 늘 곁에 있었기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삶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다. 번아웃이 자주 찾아 왔으며, 삶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대학교 전공을 그대로 살린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막막했다. 자꾸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고, 이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그러다 결심을 했다. 안정적인 삶에서 잠시 나와서, 모험을 해 보자고. 회사를 계속 다니는 삶은 굉장히 예측 가능한 형태로 흘러간다. 3일 후의 내 모습과 3개월 후의 내 모습, 그리고 장기 근속을 한다면 3년 후의 내 모습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오래오래 다니면 직급과 연봉은 조금 올라가 있으려나. 지금은 내가 실무를 직접 하고 있지만, 아마 20년 정도 회사를 더 다니고 나면 비슷한 업무의 컨펌 라인 정도까지는 올라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나 그 때나 월화수목을 저주하고 금토일만을 기다리며, 다음 달 월급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이건 너무 예측 가능한 삶이지 않나?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운동 선수가 되거나 농사를 짓겠다는 건 아니다. 지금 하는 일을 그대로 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동안 직장상사가 시키는 일을 받아서 했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직접 찾아서 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도 가지면서,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하면서.
얼마 전 보았던 유튜브에서 '초보심'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처음 시작해서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야식을 먹으며 가볍게 본 영상이었지만, 그 이야기가 아주 깊숙하게 내 뇌리에 박힌 것 같다. 지루하고 익숙한 것들 투성이였던 내 일상에 아주 큰 초보심 하나를 심도록 해야겠다. 바로 오늘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