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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Feb 01. 2021

드라마: 하나꼬(花子)와 앤

빨강머리 앤의 탄생

어제 큰 일을 하나 마쳤다. 지난 10월부터 시청하기 시작한  <하나꼬와 앤>이란 일본 TV 드라마를 드디어 다 보았다. 장장 160회가 넘는 일일 드라마이다.


19세기 말 후지산(富士山) 자락에 있는 코후(甲府)라는 깡촌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중반에 걸쳐 번역문학가로 활약한 무라오카 하나꼬(村岡花子)의 반생을 그린 실화 드라마이다. 주요 인물이나 사건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지만, 또 많은 부분은 픽션이다.


하나꼬(花子)의 본명은 하나(花)이다. 하나는 항상 하나꼬로 불리길 원한다. 지금은 아끼꼬( 明子), 히데꼬(英子), 토시꼬(淑子) 등과 같이 수십 년 전부터는 일본에서 꼬(子) 자로 끝나는 여자 이름이 많고, 더욱이 최근에는 레이나, 마리아 등과 같이 여자들 이름이 더욱 화려해졌지만, 원래는 지체 높은 집안의 여자들이 이름에 “꼬”를 붙였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렇게도 “하나꼬”란 이름이 좋았지만 누구도 하나꼬로 불러주지 않는다. 나중에 필명을 하나꼬로 하여 마침내 소원을 이룬다. 

하나꼬의 첫 번째 번역 작품이 <왕자와 거지>이며, 그리고 필생의 번역작품이 바로 <빨강머리 앤>이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소설 <빨강머리 앤>은 대부분 하나꼬가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초록 다락방의 앤>(Anne of Green Gables)인데 하나꼬가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빨강머리 앤>으로 바꾼 것이다.


찢어질 듯 가난한 집안에서, 다소 허황기가 있는 하나의 아버지는 사정사정하여 하나를 동경에 있는 슈와 여학교에 입학시킨다. 이 학교는 캐나다 여성 블랙반이 설립한 서양식 기숙형 학교로서 대부분의 학생이 명문 귀족이나 사업가 집안의 딸들이다. 학비가 비싸지만, 하나의 하버지가 블랙반 교장에서 사정을 하여, 하나가 기숙사 청소를 하는 대가로 학비를 면제받고 학교에 다닌다. 여기서 하나는 영어를 배운다.


하나를 슈와 여학교에 입학시키려 가는 기차 안에서 부녀가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아빠 영어란 게 어려워?"

"아니, 조금도 어렵지 않아. 세 가지 말만 알면 돼"

"그게 뭔데?"

"아침에는 굿도 모닝구,

낮에는  굿도 아후터눈,  

저녁에는 굿도 이브닝구

이것만 알면 돼"


하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친구들과 사귀게 된다. 그 가운데서 하나보다 나이는 훨씬 위이면서, 이혼 경력이 있는 하야마 렌꼬(葉山蓮子)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하야마 렌꼬는 일본의 유명한 여류 단가(短歌) 시인인 야나기와라 하쿠렌(柳原白蓮)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렌꼬는 황족 집안의 첩의 딸로 태어나 14살에 정략결혼을 한 후  이혼하는데, 집안에서 세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제로 슈와 여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20세기 초, 중반 격변의 시대를 하나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해쳐나간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면서 사회가 냉각되는 속에서 하나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하나는 출판사 일을 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고, 렌꼬는 다시 오빠의 강요에 의해 규슈의 거부와 결혼을 하고, 하나의 학교 친구들은 저마다 사회활동을 하고, 하나의 오빠는 사복 헌병이 되어 반체제 인사들을 사찰하는 일을 한다.


전쟁이 정점에 다다라 매일같이 동경에 폭격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하나는 <빨강머리 앤>의 번역에 온 힘을 쏟는다. 전쟁이 끝나고 하나는 미군 점령군 사령부에서 통역 일을 하면서도 번역을 계속하여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그리고 번역자의 이름을 자기가 지금까지 그토록 원했던 하나꼬(花子)로 한다.


이 드라마에서 하나꼬의 생애와 함께, 하나꼬와 오랜 우정을 나누었던 하먀마 렌꼬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렌꼬는 비록 첩의 자식이긴 하지만 따지자면 쇼와(昭和) 천황과 사촌 간이다. 일본도 정실의 자식과 첩의 자식 간에는 차별이 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심한 차별은 없다. 첩의 자식이라도 귀족의 자제는 엄연히 귀족 대우를 받는다. 


렌꼬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한 후 이혼하고, 다시 오빠의 강권으로 석탄 왕이라 불리는 규슈의 사업가 카노 덴스케(嘉納伝助)와 결혼을 하는 등 스스로의 생을 선택하지 못하고 집안의 결정에 휘둘린다. 두 번째 남편인 카노 덴스케는 전형적인 졸부로서, 돈은 많지만 무식하다. 시와 예술을 즐기는 렌꼬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 렌꼬는 규슈에서의 생활에 지쳐 앤을 만나러 동경에 와서는 우연히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동경대 법대생을 만나 “사랑의 도피”를 선택한다.  

일본 드라마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다른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선악의 구분, 갈등구조가 뚜렷하다.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극악한 악인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바보라 할 정도로 착하다. 그리고 주인공과 악인 간의 첨예한 갈등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에 비해 일본 드라마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갈등구조도 그렇게 심하지 않고, 이야기 전개도 밋밋하다.


하나가 꼬후에서의 어린 시절, 하나의 집안은 지주인 <토쿠마루 진노스케>의 토지에서 소작을 해서 먹고 산다. 토쿠마루의 아들은 하나의 친구로서 매우 심술궂은 녀석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라면 지주는 악독하게 하나의 가족을 괴롭히고 수탈하는 악랄한 인간으로, 지주의 아들도 하나를 괴롭히는 나쁜 아이로 그려질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지주는 비록 좀 욕심이 많긴 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며, 그 아들도 심술궂긴 하지만 조금 경박할 뿐이며 심성은 착한 아이다.

돈으로 렌꼬와 결혼을 하는 카노도 그렇다. 비록 무식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렌꼬에게 함부로 대하지만 결꼬 악인은 아니다. 동경대생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한 렌꼬를 찾아내고도, 그것이 렌꼬의 선택이며, 렌꼬의 행복이라 생각하고는 쿨하게 물러선다. 


나이가 드니 갈등구조가 심각한 드라마는 보기가 싫다, 너무 피곤하다. 일단 한번 보면 중독성이 강해 자꾸 보는데, 뒷맛은 개운치 않다. 


오늘부터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했다.

"은하철도 999" 이것도 130회 정도의 긴 애니메이션이다. 사실 난 5년에  한 번쯤 이 만화를 완독 한다. 지금까지 네댓 번 완독 한 셈인데, 애니메이션은 처음이다. 앞으로 또 두 어 달은 심심찮게 지낼 것 같다.


(2017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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