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마치고 바디로션을 손바닥 가득 따른다. 새하얀 웅덩이가 내 손바닥을 꽉 메우고 있다. 해마다 양이 늘어나는 것 같다. 한계가 없는 듯 내 몸은 바디로션을 집어삼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바람 드는 초가을엔 해 질 녘만 되면 모래로 만든 사람처럼 부스러지는 기분을 느낀다. 버려진 피부 조각이 나의 죽은 세포들이라면, 나는 매일 남들보다 한 줌 더 빠르게 죽어가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보, 찬우가 결국 헤어졌다네"
"그... 당신 대학 동기인가?"
"예전에 입시학원 같이 다녔던.."
"아아 맞다 그랬지"
"2년 남짓인가, 결혼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갑작스럽네"
"힘들겠네 그 친구. 밥이라도 한 끼 사줘"
"그래 뭐... 다음에 한 번 만나야지"
힘들겠네. 그 말이 깊이가 없어서 아주 짧은 화가 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갑자기 갈증이 나서 부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선반 아래 넣어둔 와인 하나를 꺼낸다.
"당신도 마실 거야?"
"난 와인 마시면 머리가 아파서"
"아 그렇지"
다 아는 것을 모르는 듯 물어보고 늘 하던 답을 처음인 듯 대답한다. 그것이 예의다. 우리는 웬만한 말로는 서운함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 사이가 되었기에.
상부장에서 아무 컵이나 잡히는 대로 꺼내려다 다시 마음을 바꾸어 아끼는 와인잔을 선택했다. 냉장고에서 발사믹 식초에 절여둔 토마토도 꺼내왔다. 남편은 이미 거실로 자리를 뜬 뒤였다. 그릇에 덜기도 귀찮은 마음에 넓은 유리병 안으로 슬쩍 포크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어차피 쓸 것을 더 나은 것으로 고르는 성의는 있지만, 안 해도 될 것은 그냥 안 하고 마는 것이 몸도 마음도 편한 것이다. 완벽하게 아름답거나 잘 갖추어진 삶에 흥미가 없다. 내 삶을 대하는 일말의 예의만 남은 것이다.
상온에 둔 와인은 내 체온과 비슷하다. 나는 이 미적지근한 온도를 사랑한다. 조용히 입안으로 흘러들어와 온갖 잡내를 쥐고 목구멍으로 사라지는 친절함. (나의 원형이란 게 있었다면) 원래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혀뿌리가 아리도록 뜨겁거나 관자놀이를 거슬리게 하는 차가움처럼 나를 격하게 일깨우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왔다.
해가 갈수록 적당한 것을 택하게 된 것이 나의 건조함과 관계가 있을까. 예의를 갖추는 정도에 그치는 삶.
친구의 이별 소식에 어쩌면 너무나 차갑거나 뜨거웠을 그 마음을 어떤 말로 위로할지 몰라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문장들을 읊조렸다. 밤을 지새우며 함께 그년이 썅년, 그래도 좋은 년이었지, 내 마음에 빗대어 함께 울어주던 날들은 브라운관 티비 속의 저화질 영상만큼 아득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었다. 할 말을 찾아 핸드폰 액정 위를 서성이던 엄지손가락이 수치스럽다. 언젠가 나를 알던 사람이 내게 그랬지. 너 결혼하더니 왜 이렇게 변했냐. 노잼 인간이네.
나는 이제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냉장고의 차가운 냉기에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입안으로 들어온 토마토의 감각이 생경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어디론가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심리적 동조는 가정을 위협한다. 가족이란 저마다의 자리에서 기둥이 되어 삶을 받들어 사니깐, 우리는 함께 불 속을 뛰어드는 장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란 말이다.
붉고 차가운 토마토가 금세 내 체온에 덥혀지는 것에 안도한다.
이런 나의 미적지근함이 얼어붙고 타오르는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은 이내 다시 오로라를 쫓아 빙하의 세계로, 타오르는 활화산을 보기 위해 안식처를 털고 떠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
갈수록 건조해진다. 육체는 늙고 감정은 온도를 잃는다. 상온의 세상에 놓인 나는 저 차갑고 뜨거운 세상 안에 살았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다. 팔을 쓰다듬으니 조금 전에 발라둔 바디로션이 흔적 없이 스며들었다. 스며든 것인지 증발한 것인지 모르겠다.
화도 슬픔도 절절한 애정도 없이 이대로 부스러지는 삶인 걸까. 찬바람에 후드득, 바닥에 떨어질 나의 존재가 두려워 다시 한 번 로션을 듬뿍 바른다.
나는 얼거나 타지 않는 상온 인간의 세계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