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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Jul 20. 2023

해피엔딩이라면 좋겠지만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36

스트레이가 노숙 생활을 벗어나 번듯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는 데에서 이 글을 끝맺었다면 그럭저럭 해피엔딩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듣기 좋은 이야기, 더 많은 수요가 있는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에 태어난 주인공이 고난과 방황을 겪다가 강한 의지와 명석한 머리로 자수성가하는 데에서 마무리되는 감동 실화.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아무리 큰 변화가 일어나도 그 후로 삶은 하루하루 계속된다. 여유 있고 안정된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거나 인생의 다른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정착한 후 스트레이는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좋은 직업이 뒷받침해 주는 정착은 안락했다. 그러나 아무리 안락하다 해도 결국은 노예 같은 생활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집세를 내고 배를 채우기 위해 매일 일을 한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저축한 돈을 까먹으며 전전긍긍한다. 그러다가 죽는다. 회사원이든 노숙인이든, 세상은 개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떠돌이 생활이 위험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처음에 정착 생활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도 적응하고 나니 편안했다. 그래도 노숙을 할 때는 힘들기는 했지만 자유로웠다. 가고 싶은 곳에 갔고, 하고 싶은 행동을 했다. 세상이 스트레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 스트레이도 세상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으로 화물열차를 타기 시작했던 스무 살 스트레이가 스물네 살 스트레이를 봤다면 정착은 오히려 실패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혁명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가난과 노숙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단 떠돌이가 된 이상,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삶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잃을 것이 많지 않았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객사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직접 겪어 보자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풍부한 경험과 통찰을 얻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너무나도 큰 마음과 몸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죽음을 전해들을 때의 기분도 참담했다. 비정한 세상에 순응하는 일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을 돌리는 것도 해답은 아니었다.


스트레이가 좋아하는 램섀클 글로리Ramshackle Glory라는 밴드의 노래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이 밴드의 멤버들도 스트레이처럼 떠돌이 생활을 겪은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자니 직업이 없고, 건물을 부수기에는 너무 취했지. 해답을 찾기에 난 너무 망가졌어. 만약 해답을 찾는다면 밑바닥에서 병들어 가는 내 삶에 대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내 더러운 옷에 어울릴 액세서리를 고르듯 선택한 밑바닥. 나는 몇 달째 목욕을 하지 않았지만, 너도 알듯이 부르주아 도덕에 맞서느라 그런 건 아니야. 그저 게으르고 어린 탓이지. 나는 내 세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주차장 옥상에서 술이나 약에 취해 죽고, 폐건물에서 다른 떠돌이들에게 맞아 죽는 걸 봤어.’


가난과 노숙을 거쳐서 정착하기 전까지, 스트레이는 세상에 항상 화가 나 있었지만 동시에 희망과 이상을 품고 있었다. 스트레이는 만민평등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를 꿈꿨다. 자신과 친구들처럼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착 후 스트레이가 꿈꾸는 세상은 이상이 실현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문명이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바뀌었다. 세상이 개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 세상이 무너져버린 상태가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스트레이는 멸망한 세상에서 자신이 잘 살아남을 것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노숙을 할 때 이미 비슷한 생활을 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신의 꿈에 대해서 죄책감도 느낀다.


스트레이는 이미 2009년 피츠버그에서 시위 진압 경찰에게 갈비뼈가 부러진 후로 시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웹 개발자로 취직한 후로는 정치 모임에 나가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기도 했고, 모임들의 내부 정치에도 환멸을 느꼈다. 급진적 무정부주의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부모에게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스웠다. 입으로는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집세에서 전화요금까지 전부 부모가 내 주고 있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스스로 생활비를 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임에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스트레이는 종종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했다. 티셔츠 프린트 가게를 그만둘 때 프린팅 기계를 집에 들였는데, 그 기계로 인종차별 반대 문구와 팔레스타인 지지 문구를 티셔츠에 인쇄하기도 했다. 티셔츠는 펑크 콘서트에서 판매하도록 기부했다.


정착한 후 스트레이는 슬럼가에서 어릴 적 사귄 친구들과 노숙하면서 사귄 친구들을 계속 만났다. 그러나 그 친구들 중 상당수가 죽었다. 약물남용, 특히 헤로인 남용으로 인한 호흡정지가 가장 흔했다.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 또는 중독의 위험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약물에 빠져든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자살도 적지 않았다. 살해당한 사람도 몇 명 있다. 특히 떠돌이 생활을 할 때에는 함께 여행하던 친한 친구라도 언젠가는 서로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헤어진 후 죽은 친구들을 생각할 때 스트레이는 힘들어한다. 그때 한동안 더 같이 있었다면 자신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함께 노숙하던 친구들은 죽었는데 자신은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도 스트레이는 죄책감을 느낀다. 약육강식의 노숙 생활 속에서 착한 사람들은 일찍 죽고, 자신은 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또 남들과 자기 자신에게 수도 없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그런 과거를 혐오한다.


항상 위험과 어려움에 직면한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지금의 평온한 생활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스트레이는 말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투쟁 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 상태라고 한다. 위험 앞에서 싸우거나 도망치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야생동물과도 같은 그 상태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스트레이가 악몽을 꿀 때 흔히 등장하는 것 중 하나도 무언가 위험에서 도망치는 상황이다. 위험이 닥쳐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꿈을 꾸기도 한다. 스트레이는 겁이 없지만 그래도 무서워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처럼 막연하고 동물적인 위험이다. 길을 걸을 때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등 뒤에서 조금만 가까이 걷고 있어도 곧바로 경계심과 불안을 느낄 정도다. 아마 노숙을 시작하기 훨씬 오래 전인 어린 시절, 아버지가 걸핏하면 주먹으로 때리던 때부터 시작된 상태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악몽의 소재 또 한 가지는 법정이다. 현실에서 한두 달보다 긴 형기를 받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선고와 함께 자유를 빼앗기는 순간은 항상 최악이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법정에서 터무니없이 긴 형량을 선고받는 꿈을 가끔 꾼다. 플로리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약물중독에 대한 악몽도 꾼다.


스트레이에게 몸과 마음의 평화는 아직도 낯선 대상이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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