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5
2000년대 초 내가 다닌 외국어고등학교의 생활은 이랬다. 당시에 다른 외고가 어땠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 내 모교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하루 일과는 원래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해서 밤 9시 20분에 끝났다. 그러다 내가 2학년 때 7시 50분에 시작해서 밤 9시 40분에 끝나는 것으로 20분씩 늦춰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을 항상 힘들어했던 나는 단 20분이라도 늦춰지니 살 것 같았다. 서울 각지에 스쿨버스가 다녔지만, 스쿨버스를 타지 않는 아이들이 타는 아이들보다 조금 더 많았던 것 같다. 어차피 새벽 일찍 등교해서 밤늦게 하교했기 때문에 버스를 타도 길이 막히지 않았다.
첫 시간은 정규 수업을 시작하기 전의 강제 보충수업인 ‘0교시’였다. 이제는 여러 지역에서 금지되었다고 들었지만 그때는 외고뿐만이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실시했다. 문과와 이과를 불문하고 공통 입시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수업이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이르다는 점을 빼면 보통 수업과 똑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7시 30분까지 출근해서 수업을 하던 선생님들도 참 힘들었겠다 싶다.
0교시가 끝나면 담임 선생님의 조회 시간이 있고, 그 다음은 정규 수업이었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오후 보충수업, 그 후에 저녁을 먹고 나면 밤까지 야간자율학습이었다. 수업 분위기는 선생님이 누구냐에 따라 많이 달랐다. 다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외고에 왔기 때문에, 공부 자체를 포기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모든 수업에서 태도가 좋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선생님들을 평가했다. ‘잘 가르친다’고 평가한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다들 집중했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집중했다. 체벌이 0교시만큼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외고였던 덕분에 체벌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물지도 않았다. 무섭지 않은 선생님들 중에서 ‘잘 가르치지 못하는’ 선생님, 또는 잘 가르치고 아니고를 떠나서 입시 과목이 아닌 수업의 선생님에서는 다른 과목 책을 교과서 밑에 숨겨놓고 공부했다. 관대한 선생님, 나쁘게 말하면 만만한 선생님의 시간에는 졸거나 옆자리 아이와 소곤소곤 수다를 떨었다.
외고의 목적은 외국어보다는 대학 입시였지만 외국어 수업 시간은 많았다. 당시에 일주일 당 과목별 수업 시간을 세어본 일이 기억난다. 영어 시간이 모든 과목 중에서 가장 많았고 전공 언어가 그보다 단 한 시간이 적어서 두 번째로 많았다. 영어는 같은 ‘국영수’인 국어나 수학보다도 조금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외고라는 명분과 대입이라는 실리에 모두 해당되는 과목이었기 때문일까?
아이들도 영어를 많이 의식하는 편이었다. 조기유학을 다녀와서 영어가 유창하고 영어 발음이 좋은 아이들이 반마다 조금씩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우리 반에는 영어 발음이 원어민에 가까운 여자아이가 두 명이 있었다. 1학년 1학기 반장선거에서 여자 반장 후보로 그 두 명이 추천되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강력한 아우라를 발한 것이 그 아이들의 영어 발음이었기 때문이다.
전공 언어는 사정이 달랐다. 다른 과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 과에서 전공 언어 시간에 아이들이 집중했던 것은 1학년 때뿐이었다. 처음 접하는 스페인어가 신기했고, 외고 생활 자체도 신기했던 것이다. 입시 과목에 집중해야 한다는 초조함도 아직 덜했다. 2학년이 되자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스페인어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수시보다 정시 비중이 훨씬 크고 수능시험이 가장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이과 수능에는 제2외국어가 아예 없었고, 문과 수능에는 제2외국어가 있었지만 서울에 있는 외고의 학생이라면 무조건 만점을 받을 만큼 쉬웠다.
나는 스페인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수업에 계속 집중했다. 선생님의 질문을 듣고 소리 내서 대답하는 학생이 반 전체에서 나 혼자인 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모든 어른을 무조건 공경해야 한다는 사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다른 아이들이 드러내놓고 스페인어 선생님들을 무시하는 광경은 어린 마음에도 보기 민망했다. 그렇게 나 혼자서 열심히 공부했던 스페인어가 지금까지도 기억나면 좋을 텐데. 외국어는 반복하지 않으면 금방 다 잊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