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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저빔 May 09. 2023

선생님처럼 하면 안 되는 체육 시간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앞구르기 수업을 위해 체육 창고에서 매트를 꺼내 옮기고 있을 때였어요. 슬그머니 제 옆으로 다가온 보람이가 흔들리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보람이는 며칠 전 전학을 온 아이였어요.


  “선생님, 있잖아요. 제가요, 전에 학교에서 앞구르기 한 적 있었는데요. 그때 애들이 막 비웃고 남자애들이 놀리고 그래서요, 그때 제가 좀 울었거든요. 그래서요…”


  이쯤 되면 보람이가 초조해하며 전하고 싶은 말이 ‘저 안 하면 안 돼요?’라는 것 정도는 눈치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 보람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나중에 해보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해줘.”

  시퍼렇게 긴장한 보람이를 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릴 적 체육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아이였거든요.     


  초등학교 교사에게도 전공과목이 따로 있습니다. 교대에서 심화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깊이 있게 배우는 과목이 그것이지요. 심화 과정에 자신감과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선생님도 많으실 테고, 또 반대로 선생님마다 피하고만 싶은 과목도 있을 것입니다.


  제 심화 과정은 영어입니다.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가장 피하고 싶은 과목은 체육입니다. 어릴 때부터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서 체육 시간마다 늘 움츠러들었지요.


  초등학교에는 체육 전담 교사가 따로 있어서 담임이 체육을 지도하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학교 여건에 따라 담임이 체육 과목을 가르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교사가 ‘잘하는 과목’과 ‘잘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잘하는 과목을 가르칠 때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장착된다고 여기는 편입니다. 체육을 못하는 제가 자신 있게 체육 수업에 임하기는 힘든 것처럼요.     


  영어에는 늘 기죽지 않았기에 아이들은 당연히 저와 함께 한 영어 수업을 많이 기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발음을 한껏 굴리며 잘난척했던 제 모습을 기억하는 아이는 잘 없었습니다.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평균대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던 제 모습을, 아이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선생님 다리 떨리는 거 좀 보라며 깔깔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즐겁고, 평균대에서 떨어지는 거 아니냐며 한마음으로 걱정해주던 아이들의 다정함도 고마웠습니다. 함께 웃었던 기억 덕분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수업이 된 것이지요.


  “친구들은 선생님처럼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저의 체육 수업은 늘 이렇게 시작되곤 했습니다.


  “평균대에서는 선생님처럼 이렇게 아래를 보면 안 돼요. 평균대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면을 보고 걸어야 안전해요.”

  당연히 저는 아래를 보고 걷습니다. 시선을 정면에 둘 용기 따위는 없으니까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걷고 있는 저를 보고 아이들은 키득대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얼마 안 남았어요. 할 수 있어요.”

  분명히 시범을 보이는 중인데 이상하게도 응원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더 즐거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용기를 주는 아이들의 따뜻한 격려를 받기도 하고요.


  “뜀틀 위에서는 선생님처럼 이렇게 앞에 손을 짚으면 안 돼요. 그러면 손목을 다치기 쉬워요. 그래서 선생님이 잘 못 넘은 거예요. 뒤쪽 2/3 지점에 손을 짚어야 안전해요.”


  교과서 못지않게 완벽한 이론이지만, 뒤쪽에 손을 짚어 넘는다는 건 머리로만 이해되는 지식일 뿐입니다. 단계가 높은 뜀틀에서는 손을 멀리 뻗을 용기가 없어 꿈도 못 꿀 일이거든요.


  “뒤구르기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해요. 선생님처럼 겁먹으면 이렇게 돼요. 절대 못 굴러요. 자신감을 가지고 재빠르게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 붙여야 돌 수 있어요.”


  역시나 이론과 실기의 큰 온도 차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앞구르기도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처지에 뒤구르기는 겁이 나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시간이면 남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신나게 달리는데 혼자만 울퉁불퉁한 흙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심각하게 운동 신경이 없어 교대에서도 F 학점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체육 시간을 버텼던 저였습니다.     


  “선생님처럼 하면 안 돼요.” 화법 덕분에 아이들과 참 많이 웃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의 질문도 달라졌어요. ‘선생님, 이건 어떻게 하면 돼요?’가 아니라 ‘이건 어떻게 안 하면 돼요?’로 말이지요. 말은 부메랑과 같아서 뱉은 대로 돌아온다더니 정말로 그랬습니다.


  어설픈 시범에 적응한 아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방법을 터득해가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자신이 생겼습니다. 속으로는 청출어람을 되새기며 뿌듯하기까지 했고요. 아이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새로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잘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도 좋지만,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도 좋은 공부라는 것을요.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던 저의 의도를 알 리 없으셨던 넉살 좋은 체육부장님이 지나가며 한마디 하신 적도 있었어요.

  “아니, 거 잘하는 애들 불러서 시범 보이면 될 걸, 왜 그러고 있어? 보기 안쓰럽게.”


  걱정으로 하신 말씀이란 걸 알기에 당연히 감사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체육에 관해서라면 스스로 가진 기대치가 몹시도 낮아서 상할 자존심 같은 것도 없었거든요. 늘 엉터리 시범을 하는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이 기꺼이 반겨주니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지요.


  땅바닥에 달라붙은 수준의 실력을 스무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당당히 뽐내고 나서야, 비로소 운동 고수 어린이의 시범 도움을 받습니다. 교사의 형편없는 시범을 감상하던 아이들은 너도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자신만만입니다. 최소한 선생님보다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보다 더 확실하고 긍정적인 동기 부여는 없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 삼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체육을 왜 이렇게 못하세요?”

  “너희들 기죽을까 봐, 일부러 못하는 척하는 거지. 선생님 원래는 체육 진-짜 잘하거든? 진정한 고수는 실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후훗”

  그러면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와르르 무너집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웃는 이런 순간이 너무 좋습니다.


  ‘선생님도 못 하는데 나도 꼭 성공할 필요는 없어.’

  ‘실패해도 우리 선생님이 있으니 덜 부끄러울 것 같아.’


  이런 생각 때문인지 체육에 자신 없어 하던 몇몇 아이들이 선뜻 참여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 건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였습니다. 미흡한 실력으로도 꿋꿋하게 시범을 계속하는 큰 이유이기도 하지요.     


  활동성이 많은 초등학생의 특성 때문에 모든 아이가 체육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체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꽁무니를 빼며 주저하는 일도 많아요. 머리나 배가 아프다며 습관적으로 구경만 하려는 아이들도 있고요.


  단순히 핑계라고만 여기기에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의욕을 세워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끔은 뿌듯하기도 합니다.


  “괜찮아, 이거 원래 어려운 거야. 선생님 하는 것 봤지? 잘하는 친구들 보고 기죽을 필요 절대 없어. 쟤들이 이상한 거고(속삭이며) 원래는 이게 정상이야. 알았지?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한번 해보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숱한 응원과 격려는 어린 시절의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 커버린 지금의 저에게라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곤 합니다.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웃음거리가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한번 도전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면 저는 둔한 몸을 덜 자책하며 자라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터널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던 체육 시간이 덜 외로웠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실패해도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정말이죠?”

  실패한다고 해서 누가 혼내는 것도 아닌데, 몇 번이고 되묻는 아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주저하던 아이들이 그런 말을 내뱉을 때가 속으로 제일 기쁩니다. 교사의 서툶이 아이들에게는 격려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는 순간이니까요. 아마 체육을 잘하는 선생님들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기쁨이 아닐까요? 이런 순간에는 세상이 꼭 불공평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혼자 웃어봅니다.   

  

  포기는 짧고 속 시원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쉽게 외면하게 해주기도 하지요. 비단 체육만이 아니라 모든 배움의 순간에서, 어쩌면 실력이 부족한 아이에겐 힘든 도전을 하는 것보다 일찌감치 포기해버리는 게 더 마음 편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도전에는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않아도 될, 혹은 하면 안 될 이유가 늘 더 크니까요. ‘잘하지 못하면 부끄러워서, 친구들이랑 비교되는 게 싫어서, 어차피 못할 걸 알아서’가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두려움을 떨쳐내고 한번 해보려 애쓰는 것은 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야말로 아이가 학교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공부 중 하나입니다.

 

  저는 여전히 체육이 싫고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라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저를 보고 용기를 얻는 아이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거든요. 교사가 모든 걸 잘 해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랑 체육 수업하면 뭔가 재미있어요.”

  “선생님이 못해서 너무 웃겨요.”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걱정이 안 돼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너희들이 즐거우면 선생님의 목표는 완전히 성공이야. 아이들이 좋다는데, 더 바랄 게 있나요? 체육 수업 열심히 시켜서 국가대표 시킬 것도 아닌걸요.     


  그날 친구들이 앞구르기 연습하는 걸 멀찌감치 지켜보던 보람이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조금은 거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저도 한번 해볼래요. 잘 안되면 선생님처럼 옆으로 굴러도 괜찮죠?’


  그렇게 용기를 낸 보람이를 보는 제 마음은 날 숨으로 양껏 채운 풍선만큼이나 부풀어 올랐습니다.


  교육이란 알지 못하는 걸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만 하는 이유를 삶으로 보여주는 행위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더딘 걸음이라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의 하루에 박수를 보내주는 그런 선생님이면 좋겠습니다.


  만약 정말 자신 없는 과목이 있다면, 혹은 잘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대하는 선생님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봐주세요. 그러면 부족한 아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뭔지 눈에 보일 거예요.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잘하는 아이들은 그냥 놔둬도 잘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더 좋은 교사, 더 나은 부모의 자리로 이끌어준다는 걸 잊지 마세요.


  교사의 완벽한 시범보다 아이들이 즐기는 수업이 되게 하는 것, 잘하지 못해도 도전하는 일이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해주는 것, 걱정은 접어두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소박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더 가치 있는 교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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